머리카락: 서울에 살면 갖게 되는 특권들
서울에서 살면 가지는 첫 번째 특권은 도로가 막혀도 시속 40KM는 갈 수 있다는 겁니다. 교통 체증이 심하다고 하지만 대구나 부산과 비교하면 도로상황이 그리 나쁜 것이 아닙니다. 교통체증이 있어도 차의 속도가 0인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부산의 경우 교차로마다 신호를 기다릴 때면 하염없이 차를 세우고 기다려야 합니다. 그래서 중간에 끼어드는 차를 앞차가 허락하면 앞차에 대고 뒤차에서 경적을 울리고 욕을 합니다. 차가 한 대 끼어들면 뒤차는 다음 신호를 받을 수 없는 상황으로 다시 5분을 더 기다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서울에서는 그래도 끼어드는 차량에 대해 뒤차의 아량이 큰 편입니다. 서울 사람의 아량과 불편한 욕설을 하지 않는 교양은 많은 차에 비해 도로상황이 훌륭한 때문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두 번째 특권은 프라이버시가 존중된다는 점입니다. 다른 도시라고 다르지 않다는 지적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아파트라는 주거의 형태를 가장 먼저 도입하고 발전시킨 서울은 다른 지방에 비해 프라이버시를 존중합니다. 지방에서 사는 친구들은 아무런 통보도 없이 친구집을 방문하는 무례를 범하는 것을 재미로 일삼기도 하지만 서울에서는 용인될 수 없습니다. 남편이 친구들을 아내의 허락없이 집에 들인다면 후환이 무시무시합니다. 현관을 맞댄 앞집과 통성명을 하고 지내는 일은 꿈에서도 허용이 되지 않습니다. 엘리베이터를 탄 모두가 앞만 보고 말이 없습니다. 간혹 아는 사람들끼리 타면 자기들끼리 떠드는 일은 가능합니다만 모르는 사람끼리는 유령 보듯이 합니다. 원래 귀신은 사람과는 소통이 안 된다고 합니다.
세 번째 특권은 문화생활이 풍부해질 가능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제가 알던 직장 선배가 고향에서 건축사무실을 개업하였습니다. 혼자서 내려온다고 하길래 왜 형수가 동행하지 않느냐고 물었습니다. “울산에는 예술의 전당이 없어서 못 내려가겠다”는 것이 형수의 대답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술의 전당만 있습니까 어디? 국립극장도 있지요. 세종문화회관도 서울에 있습니다. 서울은 문화의 천국입니다. “일 년에 몇 번이나 간다고” 직장 선배의 섭섭한 마음이 푸념처럼 들렸습니다.
네 번째 특권은 시월드를 피할 좋은 곳입니다. 앞의 직장 선배의 경우, 형수는 시부모가 사는 울산에서 거주하는 것에 부담을 느꼈을 수도 있습니다. 서울에 살면 지방으로 가는 명절길이 번잡하여 내려가지 않을 수 있습니다. 혹시 내려가더라도 하룻밤도 자지 않고 올라갈 핑계가 있습니다. 이익은 사유화하고 부담은 공공의 몫으로 던질 이유를 만들 수도 있습니다. 이재명 의원이 형수에게 몹쓸 욕을 한 이유를 저는 이런 이유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온 집안의 자원을 혼자서 독차지하고는 그로 인해 부족한 자원으로 인하여 다른 형제들이 피해를 본 것에 대한 보상은 회피하는 형과 형수에 대한 원망과 부당함을 표시하는 방법이 세련되지 못한 경우라고 저는 생각했습니다.
다른 특권도 세세히 자세히 더 들 수 있지만 이 정도로 그치겠습니다. 정보라의 소설, ‘머리카락’은 도시에 내린 씨앗이 머리카락으로 자라고, “머리카락은 사랑과 공감을 갈구하며 사람을 견고하게 휘감았고, 그렇게 검고 윤기 나는 머리카락의 고치 속에 휘감긴 사람은 바깥세상과 차단되었다는 사실에 더더욱 견딜 수 없는 쓸쓸함을 느끼며 자신을 감싸 안은 머리카락의 탄력과 매끄러움 속에서 유일하게 위안을 찾았”고 그렇게 고치 속에서 태아의 웅크린 자세로 혼자서 죽어갔습니다. 그래도 간혹 머리카락을 자르고 다듬어주는 사람이 있어 머리카락이 공격을 멈추는 경우도 있지만, 배신은 정을 주는 사람에게 언제나 찾아오듯 베푼 사람에게 찾아옵니다. 배신은 복수를 잉태합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이렇듯 배신과 복수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길 바라는 마음이 정보라의 소설 속에 가득 있다고 느꼈습니다. 작가의 바람이 고치 속 웅크린 자세로 죽지 않길 저도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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