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몽된 관습 공동체
“우리는 중국 고대 사상가들을 유가, 도가, 법가라는 학파 구분으로 파악하려는 경향이 있지만, 그러한 틀은 대개 후대에서 회고적으로 만든 구성물이다. 공자가 살아 있던 당시에는 확고한 의미에서의 학파나 ‘유교’라고 이름할 만한 조직화된 운동이나 현상이 존재하지 않았다. 당시의 실제 상황에 부합하는 것은 공자라는 인물이 세계를 잘 다스릴 방법을 궁금해하는 야심 찬 젊은이들의 선생으로서 상당한 명성을 누렸다는 것 정도이다.”(70쪽)
“공자는 동주 중반기에 생애 대부분을 보냈다. 동주란 기원전 770년 이후 시기를 지칭한다. 주나라 통치자는 권력이 약화된 나머지, 기원전 770년에 수도를 동쪽으로, 그러니까 황허 유역의 현재 낙양 근처로 옮겼다. 이는 주나라가 그 이전 영토의 상당 부분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했음을 의미한다. 동주 시기는 통상 춘추시기(B.C. 770~B.C. 476)와 전국 시기(B.C. 453~B.C.221)로 구분한다. ‘좌전’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문장에서 당시 분위기를 엿볼 수 있다. “나라의 큰일은 제사와 전쟁에 있다.” 공자가 살았던 사회의 이러한 두 특징(제사와 전쟁)은 바로 청동기를 널리 사용한 분야와 일치한다. 종교적 전례는 적은 비용으로 정치질서를 확보하는 방법이었다. 종교적 전례는 정치 엘리트들의 권력 유지에 필요한 신성한 정당성을 제공했다.”(79~81쪽)
“그러나 상나라를 정복한 뒤, 주나라는 종족적 배려로 귀신이 자신들에게 호의를 베푼 결과 자신들이 승리했다고 주장하는 대신 ‘천명’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활용해서 자신들의 승리를 정당화했다. 천명은 올바른 통치자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이러한 천명 개념을 통해 주나라 통치자는 친족 네트워크를 넘어서는 보편 언어로 자신들의 권력을 정당화할 수 있었다. 천명 개념을 정치적으로 사용함으로써 정의로운 정복자 계보가 생겨났다. 중국 왕조사는 새로이 천명을 받은 이들로 엮은 장기 서사인 셈이다”(86~87쪽)
“서주시대부터 춘추시대 초기에 이르기까지 기존 정치질서는 비교적 잘 작동하였지만, 춘추시대 후기에 지역 제후들(천명을 받은 통치자들의 무리)의 정치적 권위가 크게 약화되자, 친족 집단들이 경쟁적으로 부강을 위한 투쟁에 뛰어들었다. 서주의 정치질서가 해체되면서 천명이나 귀신의 권위 역시 약화되었다. 결국 “교육받은 엘리트의 대부분이 하늘과 귀신에 대한 의존이 정치사회적 질서와 와해를 막기에는 역부족이라는 확신에 이르게 되었다.” 공자가 정치질서의 새로운 기초를 찾아 나선 것은 바로 이러한 역사적 맥락에서였다. 비록 하늘이 여전히 최상위의 권위로 남아 있었지만, 그 하늘이 인간사에 직접 반응하리라고 공자는 더는 믿지 않았다. 그는 인간 세계 내에서 정치질서의 대안적인 기초를 찾았다. 신적 존재와 직접 소통하려 하기보다는 예(禮) 자체를 강조했다는 점에서 공자는 그 시대의 인물이었다.”(88~89쪽)
“공자는 주나라를 완전한 새로운 기초 위에 재정립하려 들기보다는 천하의 정치적 해체를 막기 위해 기존의 예를 재해석한 것이다. 관습 공동체라는 공자의 이상과 기존 예치 사상의 차이는, 공자가 예의 의미를 확장하고 거기에 심리적인 깊이와 융통성을 부여했다는 데 있다.”(95쪽)
“이상적인 관습 공동체 내에서 관습의 존재 이유에 대한 질문은 명시적으로 제기되지 않는다. 관습 혹은 예는 사회 현실을 산출해 내는 상징적인 힘을 가지기 때문이다. 관습이 정말 잘 존재한다면 사람들은 어떤 식으로든 그것을 따르게 된다. 행위자의 마음 습관과 행동 양식 속에 예가 잘 살아 있으면 기존의 사회 형태가 좀 더 당연시된다.”(145쪽)
“아무리 공자의 의도가 상찬 할 만한 것이었다 해도, 혹은 아무리 공자의 매력이 대단했다고 해도 공자 당대에 관습 공동체의 비전은 그 효용을 잃어가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었다. 일례로 주나라 친족 관계에 기반한 ‘봉건’체제는 독자적인 지역 권력체들의 군웅할거 상태로 변해갔다. 대부분 지역에서 행정은 해당 지역의 권력자들 손에 전적으로 맡겨졌다. 기존의 예는 더 이상 당연시되지 않았다. 분열적 현상이 당시에 분출하고 있었다는 정황증거는 논어에도 많다. 공자는 당시 사회질서에서 어느 정도 소외된 인물이었다. 그렇지만 계몽된 관습 공동체의 가능성과 권위를 급진적으로 비판하는 목소리는 논어에서 찾기 어렵다. 관습과 전통은 공자의 비전 속에서 여전히 존재감이 크다. 동시에 관습 공동체는 깨지기 쉽다는 것, 단순히 예만 가지고 통치가 잘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 관습 공동체의 통일성과 생존은 예 이상의 어떤 것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을 공자도 암묵적으로 의식했던 것 같다. 특히 공자는 관습이 화석화될 가능성에 대하여 우려하였다. 예가 다스리는 정치 공동체라는 공자의 사상은 후대 제국 왕조로 전승되었다. 그러나 그 과정에는 묘한 아이러니가 있다. 공자가 생각한 계몽된 관습 공동체는 상대적으로 작은 나라와 한정된 집단을 상정한 것이었으나, 제국의 황제들은 정반대로 생각하였다. 제국의 확장된 영토라는 조건 속에서는 국가기구가 법만으로는 사회에 침투하기 어렵기 때문이다.”(152~153쪽)
중국이 가지고 있었던 관습 중에는 신에 대한 예, 하늘이 주신 명에 따라 국가를 다스릴 정통성을 가진다는 예가 있었다. 공자는 이 예를 재해석하여 국가가 존속할 수 있기를 희망했다. 하지만 세상은 그렇게 돌아가지 않았다. 공자는 아웃사이더였다. 그렇지만 그의 예 사상은 전승되었다. 사상으로서의 공자는 ‘인싸’였던 것이다. 계몽된 관습인 ‘예’를 통하여 공동체의 와해를 막아 혼란을 없애자고 공자는 주장했다. 혼란스러운 사회는 정치사상의 변화를 요구했던 것이다.
'매일 에세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중국정치사상사, 김영민 저, 사회평론아카데미 간행 5. (0) | 2023.02.26 |
---|---|
중국정치사상사, 김영민 저, 사회평론아카데미 간행 4. (0) | 2023.02.26 |
중국정치사상사, 김영민 저, 사회평론아카데미 간행 2. (0) | 2023.02.26 |
중국정치사상사, 김영민 저, 사회평론아카데미 간행 1. (0) | 2023.02.26 |
천국의 열쇠, A.J.크로닌 지음, 바오르딸 간행 6. (0) | 2023.02.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