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문어가 나타났다. 정보라, 구한나리, 곽재식 외 지음. 아작 간행
고등학교 교실에 땅거미가 불길하게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부르기를~” 하고 시작하는 호산(呼算)을 멈추고 창밖을 보면서 주판을 교탁에 놓았습니다. 특활시간 주판을 튕기던 동급생들도 모두 저를 따라 어둑어둑 회색으로 변하는 창밖을 보았습니다. 같은 마음으로 주판에서 손을 떼고 ‘뭐 재미난 일이 없을까?’ 궁리를 하는 눈치였습니다. 누구도 어두워져 가는 교실을 밝힐 형광등 스위치를 건드리고 싶지 않은 눈치였지요.
“재미있는 얘기 하나 해봐.” “그래 하나 해봐라. 기왕이면 무서운 걸로.”
초등학교 시절, 가내수공업으로 코끼리 피리(혓바닥 피리)를 만드는 작업장에서 폐기하는 영화 필름을 용매에 넣어 필름에 코팅된 인화물을 녹이고 하얗게 변한 필름에 염색을 하는 작업을 하는 젊은 총각(어머니들은 그를 그렇게 불렀습니다)에게서 많은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어머니가 거기서 일을 하고 있어서 숙제를 끝내고는 자주 놀러 갔었지요. 총각은 영화 필름을 다루어서 그런지 영화 같은 이야기들을 많이 알고 있었습니다. 그가 들려준 이야기 중에 잘 지은 이층 집에서 귀신이 나오는 이야기가 기억났습니다. 밤마다 나타나는 여인 때문에 그 집에 들어온 사람들이 죽어 나가는 이야기였습니다.
사랑방에서 듣던 이야기들은 호롱불이나 30촉 흐릿한 전구불의 조명 탓인지 모르지만 항상 재미있었습니다. 이야기꾼 할아버지는 듣는 우리들의 간을 쫄깃쫄깃하게도 만들고, 눈을 깜빡이지 못하게도 했습니다. 제 이야기가 할아버지의 수준은 아니었지만, 괴담이 교실에도 화장실에도 흘러넘치는 학교였기에 모두가 제 얘기에 집중해서 들어주던 기억이 납니다. 그날 이후 저는 학교의 이야기꾼이 되었습니다. 인기가 오래 가지는 못 했지만서도요.
장르소설이라고 해서 우리 작가들의 작품을 읽었던 기억이 아스라이 멉니다. 작품성도 이야기의 완결성도 떨어져서 간신히 읽었던 기억입니다. 그에 비하면 외국의 작품들은 좋았다는 기억입니다. 로빈 쿡, 스티븐 킹이 번역되었다는 소식이 있으면 바로 사서 읽었습니다. 하룻밤만 새면 읽을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재미를 봤습니다. 정보라의 ‘저주 토끼’를 읽고 이 책을 찾았습니다. 많은 작가들이 자기들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폭 빠진 이야기도 있고, 그냥 그렇게 읽은 것도 있습니다. 하지만 모두가 재미있는 이야기였습니다. 과문하여 강호의 고수들을 몰라보고 있었습니다. 죄송한 마음입니다. 읽기를 계속할 마음을 가졌습니다. 이틀 동안의 책 읽기가 새롭고, 새로운 세상을 알았다는 생각에 보람을 느껴도 되겠지요? 우리나라의 장르소설이 더욱 새롭길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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