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에 대한 오해들
책을 읽으면서 내용을 정리하는 것 외에는 특별한 감상을 전하기가 어려운 책이었습니다. 바울의 서신서들을 묵상하면서 여성에 대한 비하가 심한 것은 당시 시대상황 때문이라 짐작했지만 사실은 그런 것이 아니라는 설명에 놀랐습니다. 몇몇 페미니스트 신학자들이 기독교의 오랜 여성 혐오 전통을 바울 탓으로 돌리는 주장에 대하여 바울이 후기 텍스트들을 쓰지 않았다는 것을 들어 반박합니다. 바울의 서신들 중 데살로니가전서, 갈라디아서, 고린도전서와 후서, 빌립보서, 빌레몬서, 그리고 로마서 등 단지 일곱 개만이 학자들에 의해 진짜로 판명되었고(이를 ‘진정 서신’으로 부른다고 합니다) 그 나머지인 골로새서, 에베소서, 데살로니가후서, 디모데전서와 후서, 디도서는 제2바울 서신으로 알려졌으며 바울의 사후에 기록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중 몇 개는 2세기가 되어서야 바울의 이름으로 쓰였지만 이를 오늘날의 ‘도용’과 같이 볼 수는 없다면서 고대 사회에서는 존경하는 현자나 철학자의 이름을 가져다 글을 쓰는 일이 흔했다고 합니다. 이게 당시 허용되었던 상황인 것이죠.(요즘은 어림없는 수작이지요? 대통령의 부인 정도가 아니면 함부로 하면 망신살이 뻗칩니다)
또한 바울은 노예제 지지자다. 악의적인 권위주의자다는 주장에 대하여도 저자는 바울이 인종, 계급, 성의 장벽을 극복하기 위하여 평생을 싸운 이력을 들며 오해라고 설명합니다. 평생을 싸웠지만 결국은 실패한 사도 바울을 알게 되면서 저는 많이 안타까웠습니다. 바울을 알면서 그 시대나 지금이나 세상 처세술의 여전한 비루함에 입맛이 씁니다.
바울이 예수 운동을 박해한 이유
바울이 예수 운동을 박해한 이유에 대한 설명입니다. ‘바울은 십자가형을 당한 메시아라는 도가 지나친 개념에 아연실색했다. 어떻게 죄를 지은 범죄자가 이스라엘의 존엄과 자유를 회복할 수 있단 말인가? 신명기 21:22-23절에서는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 기록되었고 실제로 열두 사도들은 예수가 죽은 그날 땅에 묻혔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바울은 대부분의 로마 군인들이 이러한 유대인들의 감성을 거의 존중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따라서 그들이 예수의 시체를 십자가에 매달아 두고 새들의 먹잇감이 되게 했을 것이라는 점 또한 알고 있었다. 이것이 그 사람의 잘못은 아닐지라도 그런 사람은 불경하고 이스라엘 땅을 더럽힌 것이었다. 이 훼손된 시신이 하나님의 오른편으로 들려졌다는 상상은 혐오스럽고 모독적이었으며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것은 하나님과 그 민족의 명예를 논란거리로 만들고 고대하던 메시아의 도래를 연기시킬 것이었다. 그래서 바울은 이 종파를 뿌리 뽑는 것이 자신의 의무라고 생각했다.’(54쪽) 유대 율법에 정통한 바울의 논리가 정연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논리 정연한 바울이 회개를 하게 되었을까요? 그 설명은 다음과 같습니다.
바울의 개종 후 사상
‘갈라디아에서 바울의 반대파들은 예수의 영웅적인 죽음과 부활이 이스라엘 내의 영적 재건 운동에 영감을 주었다고 믿었다. 그들은 과거와의 연속성을 지지했던 것이다. 하지만 바울은 십자가와 함께 완전히 새로운 어떤 것이 이 세상에 내려왔다고 믿었다. 로마법에 따라 사형을 받은 죄인인 예수를 들어 올림으로써 하나님은 토라가 부정하다고 간주했던 것을 포용하는 충격적인 조치를 했던 것이었다. 유대의 율법은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신명기21:23)을 선언하고 있다. 이 치욕스러운 죽음을 받아들임으로써 예수는 자기 자신을 율법적으로 불경하게 만들었고 자발적으로 혐오스러운 존재가 되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를 천국의 가장 높은 장소로 들어 올림으로써 예수의 명예를 회복했고, 그를 모든 죄에서 사하였다. 그러면서 로마법은 무효이고 토라가 정하는 순결과 부정의 구분은 더는 유효하지 않음을 선언했다. 그 결과 이교도들, 즉 의례적으로 부정한 자들 역시 유대교에 종속되지 않고도 아브라함에게 약속된 축복을 계승할 수 있었다.’(153-154쪽) 바울이 개종을 한 이유 또한 매우 논리가 정연하지요. 이런 그의 사상을 작가는 또 한번 더 풀어 설명합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인들에게 보내는 서신에서, 하나님을 로마법을 무시하는 사람들과의 연대를 선포한 것으로 그렸다. 하나님이 예수를 오른편으로 불러들였을 때 하나님은 억압받는 자의 편에 스스로 섰던 것이다. 갈라디아인들에게는 예수를 자발적으로 로마법이 내린 유죄 판결을 받아들이고 인류의 가장 비참한 구성원들과 연대함을 보여준 인물로 제시했다. 그리스 이념에서 찬미받은 사회 통합, 민주주의, 평등주의, 그리고 자유는 어떤 형태의 법제로도 달성할 수 없었다. 법이 가지고 있는 숭고한 이념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법은 항상 사람들을 노예로 만들고 경시하고 파괴했기 때문이었다. 세상의 법체계는 로마인을 야만인에게서, 유대인을 이교도들에게서 분리했다. 법체계는 혜택받은 남성을 여성들 위에 두었고, 노예들 위에서 우두머리 노릇을 하는 귀족들을 만들어냈다. 안디옥에서 법을 엄격하게 고수하는 것은 유대인들과 이교도들이 같은 식탁에서 식사할 수 없음을 의미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는 세례의 외침이 사회의 현실이 되려면, 권위의 개념과 무엇이 진정으로 신성한 것인지에 대한 근본적인 재평가가 이루어져야만 했다.’(162쪽) 이런 바울의 사상은 반대파들과의 갈등 속에서 위기를 겪게 되는 원인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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