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공부,오늘묵상

구원이란 무엇인가, 김세윤 교수, 두란노 아카데미 출판2.

무주이장 2022. 8. 22. 15:47

김세윤 교수님의 글을 읽고 든 의문 두 가지.

 

 김 교수의 주장을 보면서 의문이 드는 것을 기록하고 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첫째, 구원이 과연 모든악과 고난에서 해방시키는 힘일까라는 의문입니다. 유일하시고 절대적 능력을 가지신 하나님이시니 모든악과 고난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갖는 것이 논리적으로 타당해 보이지만 과연 하나님이시라고 해서 그럴 수 있을까요? 하나님이 계신 것을 제가 안 것은 성경을 읽었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다 만드신 후 아담과 하와를 만든 것 또한 하나님이십니다. 천국의 상징이기도 한 에덴동산에서 두 사람이 부끄러움을 모르고 살 수 있게 했음에도 둘은 뱀의 유혹에 빠집니다. 하나님이 만든 에덴동산에는 뱀도 살았고, 유혹도 있었다는 말입니다. 애초 하나님의 설계가 완벽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의문이 드는 부분입니다. 설계대로 운용되어야 할 에덴동산에 왜 뱀이 있었으며, 이 뱀은 창조주와 같아지지 못하게 하려고 먹지 못하게 한 것이니 먹으면 하나님과 같아질 수 있다라는 동산의 비밀을 아는 듯, 물리칠 수 없는 유혹의 포인트를 왜 가질 수 있었으며, 아담과 하와는 이 유혹에 빠질 수밖에 없는 심약한 심성을 가졌을까요. 이것은 하나님의 절대성과 완전함에 대한 의혹을 가지게 할 수 있습니다. 이런 하나님을 이해하는 우리의 노력은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에게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힘, 독립적인 결단을 할 수 있는 힘, 자의식의 힘을 주었다는 설명일 수도 있습니다. 완전하고 절대적인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 그리고 뱀조차 스스로 행동하도록 할 수 있는 힘을 주고 그 책임에서는 벗어날 수 없다는 규칙을 정했다고 말입니다. 그럴 수 있다고 저는 믿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스스로 결정하고 행동하며 그 책임을 지는 능력이 원죄를 짓는 원동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원죄를 지을 인간에게 하나님이 구원을 베푸사 모든악과 고난에서 해방시키시려면 김 교수가 설명하듯 하나님에게는 온전한 순종만 할 수 있는 인간이 되어야만 합니다. 그러면 또 논리적으로 이상한 결론이 됩니다. 애초 만든 인간들이 원죄에 빠진 것은 창조주께서 의도한 것(적게 봐도 범죄 가능성이 있는데)인데 구원을 베푸사 우리가 모든 악과 고난에서 벗어나 살 수 있는 에덴동산에 간들 뱀은 여전히 있을 것이고, 자의식을 가진 원죄를 다시 지을 가능성이 없어진 것이 아닐 진데 하나님은 어떻게 모든악과 고난을 없앨 수 있을까요? 궁금한 점 하나입니다.

 

둘째, 살아 있는 사람은 원죄를 벗어날 수 없기에 죽음의 증상들을 앓고 있으며 이 말은 결국 죽음에 이르는 것은 모든 악과 고난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는 말이 됩니다. 다만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우리는 구원을 받을 수 있을 뿐입니다. 스스로는 절대로 자신을 구원할 수 없으니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절대성과 완전성을 믿는 것이 전제된다면 무슨 문제가 있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은 예수님이 살아 계실 때 제자들에게 알려진 가르침입니다. 당시 제자들은 그 가르침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고, 예수님이 유대인들에게 잡혀가자 베드로는 세 번이나 예수님을 알지 못한다고 할 정도였습니다. 그리스도로서의 예수님을 믿지 못했던 것입니다. 십자가에 매달려 돌아가실 때에도 제자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믿지 못했습니다. 그러다 돌아가신 예수님이 부활했다는 사실을 눈으로 확인해서야 예수님이 그리스도임을 믿기 시작합니다. 김 교수는 이러한 믿음은 단지 예수님의 부활 때문 만은 아니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삶과 죽음도 또한 구원의 사건이라고 설명합니다. 예수님이 가르친 내용들은 그가 살아있을 때 이뤄졌으며, 그가 죽는 것도 그의 가르침에서 한 치도 어긋나지 않았으니 당연한 설명입니다. 그러면서도 부활은 우주 밖의 초월자가 만든 창조적인 사건이 되어 절대적인 의미를 가진다고 설명합니다.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다니 분명 의미를 가진 사건이 분명합니다. 그러면서 다른 종교들에서는 구원을 구할 수 없는 이야기가 이 부활 사건에 있다고 설명을 합니다.

 

 인류 문명의 발상지인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우리는 고대 근동지역이라고 부릅니다. 이 지역에서 인류의 문명이 발생하였다고 하니, 이곳의 신화나 종교에는 과연 부활 스토리가 없을까 궁금하여 위키백과를 검색했습니다. ‘죽음과 재생의 신이라는 제목의 글 속에 제임스 프레이저의 황금빛 가지라는 책도 소개하고 있고, ‘살아 있는 신적 존재가 한 번 죽어 지하 세계에 들어갔다가 다시 살아난다는 설화는 세계에 보편적으로 분포하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제가 주장하고 싶은 것은 유대민족이 유일신을 믿으면서도 이방신을 섬긴 것은 당시 다신교 사회가 존재한다는 증거였고, 그들의 유일신이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라 인간이 존재하면서 알게 된 신의 존재는 인간의 사고의 틀 안에서만 존재할 수 있으며, 어떤 다른 믿음을 부정하거나 자신의 믿음을 강요하는 것은 당시 현실적 힘의 세기였지 그것이 도덕적으로 뛰어나거나, 논리가 우월하거나 한 것이 아니지 않겠냐는 의문입니다. 결국 신학의 설명은 자기 합리화이자 믿음의 이론적 틀을 공고히 하는 방법이자, 신학이라는 학문의 골격을 튼튼히 하는 방법으로서 존재의 의미는 있지만, 그것이 타 종교를 무시하거나 배제하는 논리로 사용되는 것은 본연의 영역을 벗어나 타인의 믿음을 도발하거나 타인의 신체를 공격하는 논리로 이용될 수 있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입니다. 제한된 자원을 가진 인간이 만든 하나님을 설명하는 논리체계인 신학이 혹시 다른 사람들의 제한된 자원을 뺏으려는 것으로 오인될 수도 있지 않을까, 오용의 역사는 없었을까 의문이 든다는 말씀입니다. 나의 종교의 완전성이란 것을 증명하는 방법이 인간을 수단으로 사용할 수밖에 없는 하나님의 입장에서 볼 때(간혹 하나님이 직접 임재하셔서 모습을 보이시는 기적의 소식을 듣기는 하지만 그리 신빙성이 있어 보이지는 않다는 것에 동의하신다는 전제가 필요한 주장이지만, 그리고 저는 하나님을 믿지만) 그리 기대가 크지 않으실 것이고 신학의 이름으로 이 세상에서 벌어진 악과 고난의 역사가 엄연하게 사실인데 어찌 그리 확실하게 주장하실 수 있는지가  또 다른 의문입니다.

 

 저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제가 믿는 이유는 제 이웃을 사랑하고 저 자신을 사랑하기 위해서입니다. 제 이웃에는 절에 다니시는 분들도 많으시고, 골 때리는 분이라서 자주 보지 않았으면 하지만 그래도 볼 수밖에 없는 분들도 계십니다. 그들이 저의 종교활동 때문에 같이 운동하지 못하면 언제부터 교회를 다녔어요라며 같이 하지 못하는 아쉬움을 표현하기도 합니다. 저는 그저 교회를 가니 같이 운동을 하지 못할 뿐입니다. 그리고 다음 주 토요일이면 다시 반갑게 같이 운동을 합니다. 논리성과 합리성을 이유로 공격성을 띄는 것은 우리가 살면서 정치를 토론하거나 경제를 토론할 때 흔히 범하는 잘못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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