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들의 이상한 행복, 안톤 숄츠 글, 문학수첩 출판.
한때 이 세상에 진리가 있을까 의문을 가졌던 적이 있습니다. 과학적 사실도 ‘현재 주어진 조건’에서만 사실인 경우가 많습니다. 자연과학에서 나오는 말이니, 사회. 인문과학에서는 물어 무엇하겠습니까. 제가 배운 법학에서는 통설, 다수설, 소수설이란 목줄을 달고 이론을 펼칩니다. 공부하는데 애먹었습니다. 아마도 제가 박정희와 그를 추종한 군인들이 만든 교육이념이나 적이 아니면 아군이고 아군이 아니면 적이다는 양단을 자르고 흑백을 분리하며 회색은 간첩이라는 강요에 너무 절어서 의문을 가지지 않았을까 의심을 할 때가 있습니다만 어쨌든 세상에 존재하는 진리에 대한 회의감이 있었습니다. 한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과거의 사건은 과거의 조건을 배제한 채 오늘의 시선이나 잣대로 평가할 수 없다’는 주장과 ‘우리의 생존과 자존을 위하여 절대 배제할 수 없는 가치관의 존재를 무시한 과거의 행위에 대한 단죄는 당연하다’는 주장 중 어느 주장이 진리일까요? 사람에 따라 다르다고 판단하는 ‘개인의 주관성론’과 이에 정반대 방향에서 설명하는 ‘절대적 가치론’도 있을 것이며 네 말도 맞고 내 말도 맞다는 ‘양시론’과 둘 다 틀렸다는 ‘양비론’도 있을 것입니다. 지금도 즐겨 이용되는 이론은 ‘통합론’의 하나인 ‘양시양비론’이지만 동시에 가장 많이 비판을 받는 이론이기도 합니다. ‘하나마나한 말로 양다리를 걸쳐 실체 없는 말의 성찬론’이라고 비판을 받지요. 요즘도 그런 모양이지만 방송에 패널이라고 나와 전파를 낭비하는 사람들이 즐겨 쓰는 말장난이지요. 우리는 많은 변화를 좋은 방향으로 이뤘습니다. 저는 이제 진리를 믿게 되었습니다. 외국에서 공부하고 들어온 내국인의 도움도 받았지만, 한국을 관찰한 외국인의 도움도 많이 받았습니다.
안톤 숄츠는 독일인입니다. 글을 보니 광주광역시에 거주하는 외국인입니다. 그의 주장에서 한국인을 잘 이해하는 외국인의 시선을 가진 한국 거주민으로서 한국인의 시선도 아니고 독일인의 시선도 아닌 한국을 잘 이해하는 독일인의 시선을 느꼈습니다. 책의 대부분은 과거 우리가 자각하고 타인의 비판을 받아 개선하려고 노력한 결과 이제는 불편하게 느껴지지 않을 만큼 공감대를 형성한 이야기였습니다. 그래서 쉽게 읽었습니다. 문단의 첫 문장을 읽고는 건너뛰기해도 내용을 이해하는 데 아무런 문제를 느끼지 못했습니다. 어떤 면에서든 많이 개선되어 ‘이제는 선진국’이라는 자찬을 할 정도의 문화적 성숙도가 있다고 생각되었습니다. 그러나 저자도 말했듯 “아는 것보다 실천하는 것이 힘들 듯” 말한 것만큼 성큼성큼 행동으로 변화를 이끌지 못한 채 지체가 일어나는 부분을 지적하는 글은 공감이 되어 그 부분은 꼼꼼히 읽었습니다.
저자가 한국 사회와 한국 국민을 살피며 이상하게 느낀 한국인들의 행복론을 소개한 것은 한 꼭지의 글마다 관찰하여 통찰한 사실을 기반으로 논리적인 설명을 하고 있고, 많은 부분이 공감을 받을 주장이지만 어떤 것은 동의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었습니다. 그것은 저자가 걱정하듯 논의 과정이 불편해서도 아니고 그의 글이 솔직해서도 아닙니다. 그저 그의 관찰시선에 동의하지 못할 뿐입니다. 다른 시점으로 본 의견을 적어봅니다.
저자는 인터넷에서의 비판이 비난이 되고 삭제의 권리만이 설친다는 요지의 글에서 프랑스 화가 발튀스의 1938년도 작품 (꿈꾸는 테레즈) 속 미성년자인 소녀의 포즈가 성적인 행동을 연상시킨다는 이유로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이 전시를 중단하고 철거를 하라는 요구를 받았다는 예를 들면서 현대적 관점으로 예술 작품을 판단하는 것과 ‘의심스러운’ 예술가의 작품을 비난하는 의견이 종종 충돌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면서 그는 고은 시인의 작품을 교과서에서 삭제하는 것과 김기덕 감독의 영화를 상영하거나 보는 것이 적절한지에 관한 여러 논의가 매우 불편하다고 주장합니다. 요즘 기준에 맞춘 과거의 예술가가 어디 있겠냐고 주장합니다. 이 문제에 대하여 의견을 나누고 토론하는 것은 환영할 만하다고 합니다. 이 문제를 어떤 방향으로 다룰 것인가 여전히 중요한 문제라고 합니다.
인터넷의 부당하고 과도한 비난이 문제라는 지적은 옳다고 생각합니다. 적절히 관리할 수 있는 제도를 만들고 반성과 개선을 위한 성숙성을 키울 방법도 논의해야 합니다. 예술인과 예술작품을 분리해서 생각할 것인지 아닌지, 과거의 예술인과 그의 작품을 현재의 시각으로 비판하는 것에 대한 논의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 전제는 예술인의 행적에 대한 공개가 자유로이 논의될 수 있어야 합니다. 작품만 평가받고 예술인은 별개라면 예술작품만 따로 평가할 수 있지만, 자신의 작품의 높은 평가를 바탕으로 인간 예술인도 높게 평가받았다면 예술인과 작품은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작품이 작가의 권력을 만들었다는 말입니다. 고은의 작품이 교과서에 여전히 존재해야 한다면 그의 작품이 실린 교과서에 그가 비난받고 법원으로부터 선고받은 행적도 교과서에 실린 작품에 부기되었을 그의 이름 옆에 같이 기록되어야 합니다. 작품과 작가가 같이 평가받아야 하는 것이 논의의 전제가 되어야 저자의 주장이 가능합니다. 아마도 그렇게 한다면 저자는 삭제를 요구할지도 모릅니다. 작품과 행적을 토론하는 것은 공인으로서 당연하다는 주장과 개인의 명예를 오염시킨다며 반대하는 주장이 반드시 나올 것입니다. 토론이 가능한 환경이 아닌 상태에서의 저자의 주장은 피해자를 고소하여 사실을 은폐하고 호도한 예술인을 보호하려는 의도로 이해될 수밖에 없습니다. 하물며 현대를 같이 산 예술인이라면 더욱 그렇습니다.
저자의 주장에 대부분 동의합니다. 불만인 것은 철이 들고부터 듣고 또 들었던 외국인의 충고가 아직도 개선되지 않아 반복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래도 그 충고들이 선선히 수용된다는 점에 우리 사회도, 나도 많이 변했고 좋아졌다고 믿고 싶습니다. 우리 잘하고 있습니다. 그건 믿으셔도 됩니다. 이 책이 존재한다는 것이 증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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