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숭아 향기, 이승우 지음, 문학동네 출판.
그렇게 진지한 물음이 아님에도 몇 번의 질문, “어떤 과일을 좋아하세요?”의 대답은 “복숭아”라고 했답니다. 그저 시간을 때우거나, 어색한 분위기를 못 이겨 가볍게 한 질문일 수 있음에도 답은 늘 복숭아라고 했다는 말입니다. “어떤 과일?”이라는 질문에 “복숭아”라고 대답하겠다고 준비한 것도 아닌데 그랬다는 말입니다. 이거 복선이지요?
어머니에게서 들은 것으로 기억하는 아버지가 다녔다는 신문사가 있는 M시, 그곳을 단 한번도 가지 않았다는 얘기에 뭐 그럴 수 있지 않을까 하고 넘어가는 나를 보면서 ‘참 소설 쉽게 읽는다’는 질책을 했습니다. 일가붙이라고는 어머니의 오빠인 외삼촌뿐이다는 것에서도 진지하게 읽어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습니다. 건듯건듯 이야기를 끌고 가는 작가의 글에서 문장의 일정한 특징을 찾아내려고 다른 생각을 못했고, 마치 심리학 실험 속에 나오는 고릴라를 보지 못한 듯 작가의 속마음, 하고 싶은 이야기의 꼬리조차 짐작하지 못한 것에 황당했습니다.
노회 한 사업가의 함정에 빠져 병에 든 남자와 혼인을 하려고 했던 것은 어머니와 아버지가 처음 만난 곳이 복숭아 과수원이어서 그랬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합니다. M시의 이층집이 있는 복숭아 과수원, 과수원과 어울릴 것 같지 않은 과수원 속 묘지를 찾아가서 그곳에 아버지가 누워있다는 얘기를 듣고 ‘마음속이 하얗게 캄캄해지는 걸 느낀’ 후 저절로 무릎이 꿇어진 것은 심상한 질문에 아무 준비도 하지 않았지만 “복숭아”라고 얘기한 이유와 다를 바가 없는 것이지요. 아들이 말하는 복숭아는 어머니가 맡은 복숭아 향기를 자신도 이미 체화한 것이지요. 울며 진실을 전하고, 불행을 피하라고 말을 한 아버지를 어머니가 받아들인 것도 무슨 준비를 하고 어머니가 아버지를 만난 것이 아니었지요. 어머니도 그곳이 복숭아 과수원이 아니었고, 복숭아 향기가 없었다면 그런 아버지에게 운명을 느끼지 않았을까요? 그게 아니라는 건 모두 알지요?
하나님은 우리가 태어나기 이전부터 우리를 아시고 우리를 기억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신다고 하십니다. 어찌 태어나기 이전부터 그럴 수 있었을까요? 저는 성경을 묵상하면서 항상 이 말씀에 놀랍니다. 병든 아버지가 젊고 똑똑한 어머니와 결혼을 할 생각이 없었지만, 그리고 둘 사이에서 아들이 나올 것을 짐작도 하지 못했겠지만, 어머니는 운명을 보았고, 아들은 그 운명을 목도하게 됩니다. 오직 운명을 맞아 운명에 따라 살았지만 과수원 속 무덤 속에 운명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 다시 아들에게로 이어집니다. 이렇게 삶은 모두 우리가 태어나기 전 하나님의 뜻에 의해 정해지고, 정해진 길을 걷는 것인지도 모를 일입니다. 어머니와 외삼촌 그리고 무덤 속 아버지와 아들의 운명이 이어지는 길이 구원의 길이 되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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