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정한 날, 이승우 지음, 문학동네 출판.
마음속에 있는 어떤 감정을 표현하지 않았다고 해서 없는 것이 아니듯, 어떤 감정을 표현했다고 해서 그 감정이 있다고 확신을 할 수도 없습니다. 감정의 표현은 그것이 입을 통하여 나오는 말이든지, 몸의 근육을 사용하여 행동으로 표현하는 것이므로 말이나 행동으로 표현되지 못한 감정을 있다고 할 수도 없다는 말입니다. 분명히 있다고 느끼면서도 확신을 할 수 없는 상황이면 몸이든 마음이든 혼란이 찾아올 것이 분명합니다. 주인공은 여동생의 억울한 피해와 그로 인한 자살에 대하여 분노를 느끼지만, 제도권에서는 피해를 보상받지 못함을 알고 ‘어린이용 야구 배트’를 사용하여 개인적인 복수를 합니다. 두들겨 팼지요. 그러나 피해자가 가진 권력은 가해자를 협박하여 외국 생활을 강요합니다. 피해자가 가해자고 가해자가 피해자가 된다는 말이 어떻게 생기는지를 볼 수 있습니다. 사랑하기에 헤어진다는 말은 헤어지고 싶은 사람이 하면 형용모순이 되듯이, 피해자를 가해자라고 말하는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 결정됩니다. 이렇게 해서 강요된 ‘안정한 생활’이 출현합니다.
가족을 보살펴야 하지만, 가족을 떠나지 않으면 안 되는 모순적 상황. 법의 보호를 받아야 하지만 법이 공격하는 엉터리 같은 상황. 그런 모순된 상황 속에서 오랫동안 살면서 느끼는 무력감을 저자는 ‘안정’이라고 표현합니다.
법은 권력을 가진 사람들의 편입니다. ‘법은 만인에게 평등하다’는 법언을 “법은 만인에게만 평등하다”는 구체성으로 확인할 수 있으려면 권력의 부드러운 손길을 느껴보지 못한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권력의 협박을 받으면 금방 알 수 있는 구체적 사실입니다. 여동생의 피해를 복구할 수 없는 무력감과 억누를 수 없는 복수심은 어린이용 야구 배트를 손에 쥐게 됩니다. 자주 손에 쥔 야구 배트였다면, 늘 세상의 부조리를 알고 경험했다면, 가해자를 병신을 만들 정도로 병원 치료 후에 다리라도 절고 손이라도 거꾸로 붙도록 두드려 패 줄 수 있었을 텐데 황망 간에 제정신이 아닌 채 휘두르다 보니 권력은 다시 온전한 몸으로 돌아와 ‘법은 만인에게 평등하다’는 거짓말을 뱉습니다. 거짓말이 온갖 형용사와 부사로 칠갑을 하면 말이 느끼해져 구역질이 납니다. 구역질이 나면 토하면 될 일인데 토하지도 못하게 하면 사람은 강요된 ‘안정한 생활’에 빠질 것입니다.
강요된 ‘안정한 생활’은 결국 다시 어딘가에 처박아 두었던 ‘어린이용 야구 배트’를 손에 쥐게 됩니다. 어린이용 야구 배트 대신 ‘민중의 지팡이’가 제 역할을 하면 좋겠습니다만, 우리 어릴 때 자주 들었던 말은 “민중의 지팡이, 어디를 두드려 패 드릴까요.”였습니다. 경찰국이 다시 출현하니 별 이야기가 다 생각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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