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공부,오늘묵상

하나님의 정의와 공평은 요나가 요구한 정의와 공평과는 다르다(송용원목사, 매일성경, ‘비둘기처럼 다정한 사람이라면’)

무주이장 2022. 6. 29. 14:17

하나님의 정의와 공평은 요나가 요구한 정의와 공평과는 다르다

(송용원목사, 매일성경, ‘비둘기처럼 다정한 사람이라면’)

 

 제가 과거 기독교를 믿지 않았던 이유는 선민사상에 절은 유대인들의 종교에 터 잡아, 유대민족들이 믿는 민족종교를 세계 종교라고 억지를 부린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공평과 정의 그리고 사랑의 하나님이 구약에서 볼 때와 신약에서 볼 때 도저히 같은 분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죠. 구약에서 하나님은 때로 유대민족을 벌하시지만, 이민족을 핍박하고 압제하는 것이 압도적이기 때문입니다. 이 하나님이 어느 날 갑자기 예수님을 우리에게 보내셔서 아들을 십자가에 매달아 놓고는 이제부터는 세상 모든 사람을 용서하고 직접 만나주시고 구원도 주시겠다고 하니 이게 뭐지?’ 뻥찌고 만 것입니다. 그래도 사람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보았고, 아무것도 아닌 나를 알게 된 후부터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매일성경에서 요나를 설명하는 글을 읽고는 구약의 하나님에 대한 이해가 조금 생긴 듯합니다. 역시 사람은 관심을 가지고 계속 믿음을 굳게 하며 영성을 길러야 공부가 되는 건가 봅니다. 송용원 목사님의 비둘기처럼 다정한 사람이라면을 소개합니다.

 

 송 목사님은 천벌을 받아 마땅한 가해자에게 천벌을 내리고 싶어 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본심이 고스란히 드러난 성경 구절이라며 이사야서 55:7절을 소개합니다. 이런 하나님의 모습을 본 송 목사님은 프린스턴 신학교의 구약학 교수 재클린 랩슬리가 질문한 하나님은 그리스도교 공동체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 얼마나 관심을 기울이실까? 와 구약 윤리에서 하나님의 최고 관심사가 과연 공평과 정의뿐이었을까?라는 질문을 확인하고 랩슬리 교수가 말한 요나의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1.    요나는 이스라엘을 포함한 이웃 나라들에 극악한 폭력을 일삼은 철천지원수 앗수르의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심판을 경고하라는 하나님의 결정이 불공평하고 불의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부하고 다시스로 떠나 버립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의 선하심 때문에 절망했다는 말입니다.

 

2.    요나는 하나님의 자비로운 성품은 되도록 나에게는 후히 쓰시고 공의로운 성품은 되도록 원수에게만 후히 쓰셔야 한다고 생각하는 자기 섬김 유형의 인간이었고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과 자비로운 성품이 마치 사람에 따라 선택적으로 나타난다고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3.    랩슬리 교수는 요나가 공동선(common good)에서 공동(common)의 경계선을 다시 상상하는 일에 실패한 선지자였다고 지적합니다.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든, 니느웨에게든 자비를 드러나게 베푸셨던 때는 양쪽 모두 가장 자격 없던 시절이었다는 것입니다. 다행히 하나님은 공의와 심판의 하나님이기 전에 언약의 하나님이라고 설명합니다.

 

언약의  하나님이 먼저입니다. 그 언약은 유대인에게만 남긴 언약이 아닙니다.

 

4.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위해 특별 은총의 언약을 시작하셨고 그리스도를 통해 완성하기로 아브라함과 약속을 맺으신 분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아브라함과의 약속은 이스라엘을 넘어 모든 열방으로 확장되는 개방된 언약임을 확실히 해두셨습니다. 그렇다면 그 언약은 어떠한 언약이었을까요?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피조물의 공동 유익을 위해 선물로 주신 은혜 언약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루시려는 정의도 보복적 정의가 아니고 시정적 정의까지도 훌쩍 넘어선 회복적 정의였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본심입니다.

 

5.    요나는 하나님의 뜻을 대적하여 다시스로 갈지라도 자기를 떠나지 못하실 정도로 하나님은 무척이나 자비로운 분이시라는 건 영악하리 만큼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폭풍이 불거나 말거나 배 밑층에 내려가 안심하고 잠을 청할 만큼 하나님의 사적인 자비를 능란하게 활용하기까지 하지요.

 

6.    미드라쉬(주석서)에 따르면 처음 사흘 동안 요나는 물고기 배 속에서 기도를 전혀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긴급 조치를 취하여 네가 정 그렇다면 나는 이제 수십만 새끼들이 배 속에 들어 있어 네가 몹시도 괴롭게 될 다른 큰 물고기를 재차 선택하는 수가 있다하고 협박을 하시지요. 요나는 자기의 아늑한 개인 처소가 곧 끝장날 것에 잔뜩 겁을 먹고 벌벌 떨면서 그제야 기도를 시작했고, 그것이 요나서 2장에 기록된 기도입니다.

 

7.    요나의 기도는 그저 주께서 내 생명을 구덩이에서 건지셨나이다하는 개인적인 구원의 체험만 읊조리는 기도에 지나지 않았지만, 하나님은 요나를 니느웨로 가는 길목에 갖다 놓으셨습니다.

 

8.    요나는 시작부터 하나님 앞에서 공정과 정의 운운했지만, 그가 얼마나 이기적인 개인주의자인지 승선 직후 몰려오는 폭풍우 앞에서 곧장 폭로됩니다. 그는 폭풍우가 오기 전은 물론이고 폭풍우가 닥친 후에도 갑판에 올라와 이교도 선원들과 어떤 상호 소통도 할 줄 몰랐습니다. 이교도들도 자기들의 신에게 모두의 생존을 위해 기도하는데, 요나는 그의 하나님께 전혀 기도하지 않는 진풍경이 벌어진 것이지요. 팀 켈러는 선장이 요나를 꾸짖은 것은 그가 공공선에 아무런 관심도 없었기 때문이라고 일갈합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방인의 겸손한 마음이 하나님의 언약 성취에 긍정적인 역할을 해냅니다.

 

9.    그 절박한 시점에, 선지자의 형상보다 선장의 형상이 그리스도의 형상을 더 닮아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선지자임에도 이스라엘의 유익만 위해 일하는 존재로 자기를 한정했던 소인배 요나가, 모든 이의 생명을 위해 사투를 벌였던 대인배 이교도 선장 앞에서 수치를 겪게 하십니다. 이렇듯 요나의 믿음이 개인적, 지역적, 국가적 차원에 머무를 때는 그 누구에게도 어떤 유익도 끼치지 못했습니다.

 

 이제 결론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아름다울 때나 추할 때나 개의치 않고 한결같이 사랑해 주셨습니다. 그러면서 니느웨가 추하더라도 같이 사랑해 주자고 제안하셨던 것이지요. 조국을 향한 요나의 애국심이 어쩌면 그 자신만을 위한 마음이었다면, 니느웨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이스라엘을 향한 사랑에서 시작되어 모든 피조물을 아끼시는 마음이었습니다. 랩슬리는 하나님께서는 가장 폭력적인 원수마저 공동선의 경계 안으로 한껏 들이시는 놀라운 그림을 그리셨다고 탄복합니다. ‘비둘기’(dove)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요나가 동족과만 넝쿨 노래를 부르지 말고, 원수 같은 족속과도 어울려 넝쿨 노래를 부르길 바라시는 하나님이 메시지가 요나서 내내 바다 물결처럼 출렁이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보면 하나님이 보여야 합니다. 그런데 저는 요나서를 읽으면 요나만 보였고, 그가 개인주의자이며 민족주의자이며 율법주의자인 것에 못마땅했습니다. 그런 요나를 몇 번이나 용서하시고 중히 쓰시는 것에서 하나님을 오해했습니다. 하나님이 유대 민족만을 위해 아브라함과 약속을 하시지 않았다는 말에 많은 위로를 받았습니다. 이제 아브라함에게 했던 하나님의 언약에 대하여 다시 궁금증을 가지고 묵상을 하여야 하겠습니다. 송 목사님의 글에서 많은 위로가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예스24에서 가져온 이미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