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공부,오늘묵상

오늘의 QT : 공의의 심판 요청(시편 69:19-36)

무주이장 2021. 8. 25. 11:24

오늘의 QT : 공의의 심판 요청(시편 69:19-36)

 

그들의 밥상이 올무가 되게 하시며 그들의 평안이 덫이 되게 하소서 그들의 눈이 어두워 보지 못하게 하시며 그들의 허리가 항상 떨리게 하소서 주의 분노를 그들의 위에 부으시며 주의 맹렬하신 노가 그들에게 미치게 하소서 그들의 거처가 황폐하게 하시며 그들의 장막에 사는 자가 없게 하소서 무릇 그들이 주께서 치신 자를 핍박하며 주께서 상하게 하신 자의 슬픔을 말하였사오니 그들의 죄악에 죄악을 더하사 주의 공의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소서 그들을 생명책에서 지우사 의인들과 함께 기록되지 말게 하소서 오직 나는 가난하고 슬프오니 주의 구원으로 나를 높이소서(시편 69:22-29)

 

 시편을 기록한 사람의 마음이 얼마나 상하고 근심했으면 이토록 거칠고 잔인한 기도를 하나님께 드릴까요? 기자의 적들이 비방을 함에도 그래서 마음이 상하고 근심이 충만함에도 그를 불쌍히 여기는 사람들이 없고, 긍휼히 여기는 사람들을 바라고 찾으나 정녕 찾지 못하는 상황에 스스로 빠졌습니다.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사람이라면 이런 상황에 빠진 자를 어떻게 이해하지 못하겠습니까? 그가 나의 편이라면 더욱 그의 억울함과 고통에 공감을 표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매일성경의 해설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의 기도는 다소 거칠고 잔인해 보이지만, 단순히 개인적인 감정에 따른 복수심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죄와 악행에 대한 공의의 심판이 실행되기를 요청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공의를 우리는 말로나 글로 이해합니다. 그 이해가 충분하다고 믿습니다. 그런데 실상 현실에서는 하나님이 아닌 나를 기준으로 판단합니다. 내가 원하지 않는 것은 공의로운 것이 아닙니다. 어떤 경우, ‘공의롭다는 주장을 하기에 다소 마음이 내키지 않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이기에 자기주장을 합리화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정의와 공의는 결국 주관적이 되고 맙니다. 주관적인 잣대를 들이대는 믿음을 세상은 믿지 못합니다. 부모가 되어 자식을 두둔하고 보호하기 위하여 타인을 차별하고 공격하는 것이 합리화되는 시절입니다. 내 이익을 치는 대적자들은 어떤 이유에서든 공의롭지 못하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조심해야 합니다. 내가 불의라고 말하는 것이 정녕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과 일치하는 것인지를 확인 또 확인해야 합니다. 우리 신도들이 말하는 불의 중 가장 큰 것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불신입니다. 이것은 우리끼리의 기준입니다. 세상에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이 기준을 들이대고 불의한 자라고 평한다면 세상은 그 주장을 수용하지 않을 것입니다. 세상의 기준에 맞춰 우리는 세상을 사는 기독교인의 선한 행동을 권장합니다. 초기 교회의 모습이 가장 바람직한 모델로 설명됩니다. 초기 교회 성도들이 세상에서 한 행적들로 인하여 그들은 세상의 존경을 받았습니다. 오늘의 많은 선한 성도들도 또한 그렇습니다. 뉴스에서 보이는 길거리에서 기도하는 신도들이 일반화되는 오류가 있습니다. 개가 사람을 물면 뉴스가 되지 않습니다. 사람이 개를 물어야 기사가 됩니다. 세상이 아직도 완전히 부패하지 않고 살 수 있는 공간인 것은 뉴스 속의 기독교인이 소수이기 때문이라고 믿습니다. 만약 그들이 다수였다면 한국교회는 사라졌을 것입니다.

 

오늘을 사는 기독교인으로서 항상 말과 행동을 조심해야 하는 것은 내 마음속에 성령이 임재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야 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평온하면 거칠고 잔인한 기도가 나올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마음의 평안은 성령이 오실 때 얻을 수 있다고 믿습니다. 하나님께 못할 말이 없다고, 그래서 억눌린 마음의 고통을 풀어내면서 어쩔 수 없이 뱉은 저주의 말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믿을 수 있는 아버지 하나님이니까요. 그 저주의 기도는 그가 원하기에 이루어지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저 그토록 고통스러운 상황에 빠진 시편을 기록한 자의 마음이 이해되고 그를 이해하는 것이면 족할 것입니다. 그가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을 요청하는 것은 저주의 말을 퍼부은 뒤의 자기변명일 가능성이 크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뻘쭘해서 하는 말이라는 거지요.

올무, 픽사베이 출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