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T : 갈라디아서 3:10~18 유대교의 하나님과 개신교의 하나님은 같은 분인가요?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도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라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니 율법을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하였느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갈라디아서 3:10-13)
제가 처음 성경을 읽었던 기억은 스무 살, 독실한 간호사를 통하여 소개를 받고 성경을 구입한 후였습니다. 너무나 밝은 표정과 긍정적인 언어습관을 보고는 속으로 감탄을 하고 있던 간호사 실습생이 소개를 하고 내돈내산 성경을 구입하였습니다. 지금 제가 갖고 있는 성경과는 달리 국판(A4)으로 만든 것으로 글자도 컸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책을 사고는 며칠 동안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일독을 했습니다. 책을 소개했던 간호사 분도 제가 성경을 다 읽었다는 말에 깜짝 놀랐습니다. 거기까지는 좋았습니다. 성경을 읽은 소감을 묻길래 답을 하고는 아마도 제가 그분에게 상처를 주었던 것 같습니다.
“선민사상에 젖은 유대인들이 자기들 중심으로 쓴 독선적인 내용으로 가득 찼다. 요한계시록에서도 천국에 가는 사람들의 수를 정했더라. 결국 민족종교의 경전으로 보였다” 아마도 이런 내용으로 기억합니다.
구약은 하나님이 창조한 세계에서 유대인 중 한 명인 아브라함의 자손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하였음을 기록합니다. 그들이 이집트에서 노예의 고통을 겪고 있었던 것을 불쌍히 여기시어 이집트를 나서게 하고, 이를 방해하는 바로를 고통받게 하여 종말을 맞게 합니다. 이들이 여호수아의 인도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정착하고 주변 이방인들과 투쟁 속에 살면서 하나님을 믿고 배신하고 다시 믿고 또다시 배신하는 삶을 기록한 것이 구약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굳건했을 때는 융성하였고, 하나님을 배신하면 벌을 받아 이방인의 지배를 받고, 종살이를 하기도 했습니다. 유대인의 역사 속에 하나님은 항상 존재했고, 하나님이 선택한 민족인 유대인을 사랑했습니다.
하나님과 멀어진 유대인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하나님은 아들인 예수를 이 땅에 보내시고, 인간의 몸으로 죄 없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게 하였습니다. 이로써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하셔서 이제는 직접 하나님과 대면하고 대화할 수 있도록 허락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매달리기 전, 유대인들을 중심으로 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 사마리아인들이라고 해서 배척하시지는 않았지만 예수의 가르침은 유대인들이 중심이었습니다. 기존 유대교의 지도자들은 예수의 가르침이 가진 개혁의 힘을 알고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았습니다.
유대인들이 믿는 종교는 유대교입니다. 제가 과문하여 정확한 지식이 없지만 구약은 유대교의 경전이기도 하다고 들었습니다. 유대교인들은 율법을 중심으로 종교활동을 했습니다. 지금 갈라디아서에서 말하는 것이 바로 유대교인들이 가진 율법을 비판하면서 믿음을 설교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는 율법을 이용하여 예수님을 십자가라는 나무에 달리게 하여 예수가 하나님의 저주를 받았다는 믿음을 백성에게 강요 하지만, 바울은 예수님이 율법의 저주를 받아 나무에 달려 돌아가셨으나, 이를 통하여 우리를 구원하고 부활하셔서 우리에게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셨으니 유대교 지도자들이 믿은 저주는 소용이 없었다는 말을 합니다. 결코 율법으로는 믿음에 이르지 못한다는 것을 설교합니다.
그럼 율법은 무용한 것일까요? 그것도 아니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폐하려고 오신 것이 아니라 율법을 완전하게 하려고 오셨다고 합니다. 유대교의 율법을 완전하게 하려는 것은 모세에게 하나님이 주신 십계명을 떠오르게 합니다. 유대인들에게 준 첫 율법인 십계명에서부터 시작한 율법들이 결국 유대교인들의 율법일 것입니다.
율법을 완전하게 하신다는 것은 어떻게든 이해가 됩니다. 이해를 하려면 하나님의 도움을 받으면 이해가 된다고 하니까요. 그런데 생기는 의문이 있습니다. 역시 과문해서 들은 것이지만 유대교는 예수님을 메시아가 아니라 선지자 중 한 사람이라고 이해하고 있다고 합니다. 반면 우리는 예수님을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의 후손이 믿음을 가진 우리라고 믿습니다. 신분이 아니라 믿음이라는 실체를 기준으로 우리는 아브라함을 조상이라고 믿습니다. 그러면 유대교인이 믿는 하나님과 우리 개신교인이 믿는 하나님은 같은 분일까요? 아브라함의 생물학적 후손들과 믿음의 후손들이 같지 않음을 알 것도 같은데, 그게 그렇게 선뜻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 문자로 된 성경을 읽으면서 느끼는 한계입니다. 유대교의 하나님과 개신교의 하나님을 기록한 성경은 공통의 성경입니다. 그럼 하나님은 같은 분이 맞을 듯합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이 신약에서는 유대교의 하나님이 아니게 됩니다.
율법을 말할 때마다 생물학적인 유대인과 믿음의 유대인이 동일인이냐는 질문에서 아직도 답을 찾지 못하고 헤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언젠가는 답을 알게 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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