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의 자유-마르틴 루터의 ‘갈라디아서’ 읽기- 임형권 씀 (매일성경) (요약)
마르틴 루터는 1517년 독일 비텐베르크의 한 교회 문에 95개의 항목으로 기성 교회를 비판하는 글을 붙였다. 그가 치열한 성경 연구와 신앙적 체험을 통해 이해한 복음과 기성 교회가 가르치는 교리와 신앙적 행위 사이에 너무나 큰 차이가 있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고 이는 이후 인류 역사를 바꾸었다. 루터는 죄의 용서가 하나님께 속한 것이지 교황에게 있지 않다고 주장했다. 더불어 죄는 믿음을 통한 회개와 내적 변화를 통해 극복되는 것이지 면죄부를 사는 행위를 통해서는 극복될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루터의 ‘갈라디아서 주석’에서는 주로 그리스도인의 의라는 문제를 다룬다. 그가 보기에 이 의는 시민적, 법적, 도덕적, 의식적인 의와는 정반대에 있는 ‘믿음의 의’다. 루터에게 믿음은 행위와 이성에 대해 적대적이다. 인간은 행위와 사고를 통해 하나님의 은총을 거부하고, 십자가보다 자신의 영광을 구하려 한다. 이런 판단은 루터의 16세기 가톨릭 교회의 상황에서 정확히 맞아떨어지는 해석이다.
루터에게 복음과 율법은 물과 기름처럼 뒤섞일 수 없는 것들이다. 왜냐하면 율법과 행위를 조금이라도 의로움의 근거로 삼을 경우 그리스도의 죽음에 담긴 의미가 훼손되기 때문이다. 루터는 인간에게 본성적으로 신앙보다 행위를 통해서 구원을 보장받고 싶어 하는 경향이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 복음의 시작, 복음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 그 믿음이 유지되고 강화되는 것이 모두 하나님의 은혜임을 강조한다. 그러나 율법에 대한 루터의 입장은 단순하지 않다. 그도 율법의 가치를 무시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도 바울처럼 율법은 선하고 좋은 것으로 본다. 더 넓게 그는 인간의 지혜, 이성, 도덕을 그 자체로 나쁘게 보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모두 하나님이 주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것들은 인간 사회가 유지되기 위해 필요한 것들이다. 하지만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는 문제가 다르다. 율법, 이성, 도덕, 종교와 같은 것들은 하나님 앞에서 인간이 자신을 높이기 위한 자원이 되어 그리스도의 은혜의 복음을 가로막을 수 있다는 점을 루터는 지적할 뿐이다.
루터는 율법이 죄를 억제하는 긍정적인 기능을 하는 것을 인정한다. 하지만 율법은 죄인 된 인간의 자기 정당화의 수단이 될 수 있기 때문에 구원의 문제에서 부정적 요소가 될 수밖에 없다. 그가 생각하는 진정한 신학자란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으로 훈련된 사람이 아니라 복음과 율법을 잘 구별해낼 수 있는 사람이다. 죄인이 율법의 구속에서 벗어나는 일은 성령의 역사를 통해 가능하다. 루터에 따르면, 초대 교회가 적대적인 환경에 노출되어 있는 상황에서 특별한 이적이 필요했기 때문에 성령의 역사가 가시적으로 비둘기나 불의 모습으로 드러났지만, 이런 형태의 가시적인 성령 강림은 더 이상 필요가 없다. 루터는 이후로 말씀의 선포를 통해서 성령이 사람들의 내면을 움직인다고 말한다. 성령의 사람은 외적 행위를 통해 자기만족과 위선에 빠져 있지 않다. 그는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하나님께 순종하고 그분을 기쁘게 하는 것을 삶의 목적으로 삼는다.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다고 말한다. 여기서 자유는 정치적 자유가 아니다. 이 자유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해방시키려고 주신 자유, 곧 하나님이 발하시는 영원한 진노로부터의 자유를 말한다” 영원한 진노로부터의 자유는 율법, 도덕, 이성, 선행, 의식으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 루터는 이러한 종의 멍에들이 결코 인간의 양심에 평안을 줄 수 없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바울은 그리스도인이 자유를 남용해서는 안 된다고 경고하는데, 이는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육체의 방종에 대한 정당화 구실로 사용하는 자들이 있기 때문이었다. 루터도 경험적으로 이런 남용을 알고 있었다.
루터는 그리스도인의 자유와 선행이 연관되는 것으로 확신한다. 루터가 믿음의 의와 율법의 의를 대립시켰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값없이 주어지는 믿음의 의가 반드시 사랑의 행위라는 열매를 맺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루터에게 그리스도인의 자유란, 방종이 아니라 율법의 본래 정신인 사랑으로의 구속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진정 자유로운 그리스도인이란 선행을 통해 그 자신의 자유로움을 확인한다.
최근에는 루터가 믿음의 의만을 강조한 것 때문에 믿음과 행위 사이의 고리가 끊긴 것에 대한 비판도 있다. 하지만 루터는 행위를 경시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은혜의 절대성을 강조하려 했을 뿐이다. 그는 자신이 말하는 ‘십자가의 신학’과 당시 가톨릭 교회의 ‘영광의 신학’을 대조했다. 십자가의 신학은 모든 것을 그리스도의 은혜로 돌리지만, 영광의 신학은 행위, 율법, 도덕, 의식을 통해 인간을 드높인다.
1517년 마르틴 루터의 현실인식과 2021년 한국 교회의 현실인식을 대비할 수 있는 글이라 생각했다. 인간의 삶과 신앙은 1517년 이후 얼마나 그리스도의 복음을 업그레이드하여 그리스도인의 자유와 선행이 우리 사회를 순화시켰는지 확인해 볼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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