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에세이

솔개와 비둘기의 죽음을 추론하며...

무주이장 2016. 1. 17. 11:04

“사무장님. 이게 뭐에요?”

청소를 하시던 정 여사가 사무장인 나를 찾아 계단을 내려오면서 호들갑스럽게 말을 했다.

‘여자들이란 원래 죽은 쥐 한 마리를 두고도 난리를 피우니 원...’

대수럽지 않고 귀찮은 일을 생각하며 정 여사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위에 비둘기 두 마리가 죽어 있어요. 치우기가 무서워요"

‘수명이 다한 비둘기가 죽을 곳을 찾은 곳이 왜 하필이면 이곳이지?'

의아하게 생각하며 쓰레기를 치운다는 생각 정도로, 정 여사를 따라 계단을 올라갔다. 위층 출입문에서 밖으로 나가는 곳가까이에 새 두 마리가 떨어져 있었다. 문을 열어볼 마음이 없었다.

쓰레기로 보이지 않았다. 어떤 죽음이든, 죽음을 바라보는 마음은 왠지 고독하고 외롭다. 죽음 자체도 그렇고, 그런 주검을 보는 나도 그렇다.

죽음에 대한 애도의 마음으로 새를 바로 치우지 않고 잠시 두기로 마음을 정했다.

“제가 조금 있다 치울게요.” 정 여사에게 말을 하고 돌아서려다, 이상한 느낌에 발을 멈췄다. 앞에는 분명히 비둘기 같은데, 뒤의 것은 새의 몸집이 달랐다. 현관문을 통해 다시 보았는데, 분명히 비둘기는 아니었다. 주검에 사연이 있을 것이었다. 현관문의 고리를 풀고 밖으로 나갔다. 다가가는 걸음 수가 늘어날 때 마다 두 주검의 윤곽이 또렷해졌다.

‘분명히 비둘기는 아니다.’

속으로의 확신을 굳히면서, 두 죽음에 대한 호기심이 절로 났다. 그리고 소리쳤다.

“정 여사, 이건 비둘기와 솔개입니다.”

청소하시는 정 여사에게는 아무런 호기심도 일어나지 않는 말이었겠지만, 호기심에 저절로 나온 말이었다.

미그19기와 호넷 전투기의 의외의 공중전 결과를 보는 듯하기도 했고, 삶과 죽음을 가르는 욕심도 생각이 났고, 먹고 먹히는 생존경쟁의 의외의 결과를 보는 것 같기도 했다. 삶과 죽음이 바로 곁에 있으니, 오늘을 감사하며 살아야겠다는 생각도 들었고, 생존을 위해 목숨을 거는 치열함을 느끼기도 했다.

사진을 보자. 원근이 다름에도 뒤의 주검이 앞의 주검보다는 커 보이지 않는가?

조금 더 가까이서 찍은 사진을 보도록 하자.

언젠가 가평에서 본 솔개의 기억이 났다. 경기도 가평이란 곳이 겨울철의 추위가 무서운 곳으로 유명하다. 가평도 산골이다. 산에서 그 해 겨울을 들락날락하며 벌목작업을 감독하던 시절이 있었다. 솔개가 어떤 새인가?

우화에서 나오는 이야기이다. 우화에서는 독수리로 불리기도 하고, 솔개라고 불리기도 하지만, 맹금류의 조류를 예로 든 것이니 그게 그거라고 생각하자.

 

‘솔개는 젊고 힘이 있던 시절을 보내면 점점 발톱과 부리가 무디어진다고 한다. 그렇게 무력해지는 신체을 받아들여 먹이활동을 못하며 죽어가는 솔개가 있는가 하면, 스스로 무디어져 가는 부리로 먼저 자기 발톱을 뽑고, 그 뒤, 자신의 부리를 바위에 부딪혀 깨어버리는 죽음과도 같은 고통을 스스로 받아 들이는 솔개가 있다. 이러한 고통을 참아내면 발톱이 다시 자라고, 부리가 다시 나와 예전의 날카로움을 회복한다고 한다.’

 

누구는 이 우화를 사실로 받아들이는 분들도 있다. 그러나 생물학적으로는 솔개의 이런 행동은 없다고 한다. 그저 우리가 만든 우화인 것이다. 다시 젊음을 회복하는 과정에서 고통을 인내하는 삶, 스스로 극복해내는 삶을 비유해서 하는 익숙한 이야기이다. 시대와 사고, 사상, 인생관과 세계관에 따라 달리 해석이 될 수 있는 우화인 것이다.

 

이런 솔개를 가평의 산에서 보았다. 솔개는 나무의 중간 가지에 쓰러져 걸쳐 있었다. 아마도 높은 곳에 앉아 있다가 죽으면서 떨어져 중간 가지에 걸린 것으로 보였다. 내가 그를 두 손에 받아들었을 때, 깃털은 부드러웠고 솔개의 두 눈은 다 감기지 않고 조금 열려 있었다. 조류의 왕으로 이 산에서 전체를 호령했을 법한 솔개의 사인이 궁금했다. 산판을 오랫동안 다닌 분에게 전화를 했다. 솔개의 박제를 하겠다고 가져다 달라고 했다. 그에게 가져간 솔개의 주검을 보고는 그 분이 하신 말씀이다.

“겨울에 먹이사냥을 못해 춥고 배고파 죽은 것입니다. 아무런 상처가 없지 않아요? 이런 경우를 겨울 산에서는 종종 봅니다.”

그의 설명을 들으며, 허황한 솔개의 삶을 들여다 보았다. 우리가 하늘에 정지하여 먹잇감을 노리던 맹금류인 솔개를 너무 강하게만 본 것은 아니던가? 그도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아야만 생을 이어가는 종에 불과한 것을 무슨 대단한 용맹을 갖춘 귀감스러운 동물로 여긴 것은 아닌가? 그 당혹감은 솔개의 공격에 대항해 까마귀들이 집단적으로 솔개를 공격하는 행동을 본 것 이상의 당혹감이고 사실감이었다.

그런데 여기 무주에서 다시 솔개의 주검을 확인한 것이다. 이번에는 비둘기의 사체와 함께였다.

 

 

이제 이 둘의 죽음에 대한 원인을 알아보기 위해 사체의 근접사진을 제공한다. 같이 추리를 해보도록 해보자.

비둘기의 사체다. 머리부분의 깃털이 마치 머리를 감지 않아 산발한 듯 일어나 있다. 눈에 조류의 눈이란 것이 다 그렇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비둘기의 눈이 놀란 눈처럼 확장되어 있고, 충혈이 된 듯 노란 듯, 붉다. 그렇게 보이지 않는가? 머릿부분의 깃털이 땅으로 추락하면서 저렇게 되었다고 하기에는 깃털이 뽑히지 않은 것이 의심스럽다. 아마도 솔개와의 싸움에서 공격을 당한 흔적이 아닌가 싶다. 즉 이 비둘기는 솔개의 공격에 노출이 되었고, 솔개의 일격에 머리부분에 충격을 받았지만 깃털만 손상되는 상처를 입고는 놀란 눈으로 솔개를 피해 도망을 다닌 것으로 추리가 되었다.

그럼 솔개는?



보다시피 아무런 외상이 없다. 깃털의 손상도 없다. 그렇다고 지상에 추락하면서 입은 상처도 없다. 비둘기와 솔개는 둘 다 추락으로 인한 외상은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사인은 내상이다. 따로 X 레이 검사를 할 수 없어 정확하다 말할 수는 없지만, 따로이 외상이 없다면 내상으로 인한 사망이 원인이라는 것은 당연한 추론일 것이다. 솔개는 부지불식간에 사망을 한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비둘기와 달리 솔개의 두 눈은 감겨져 있다. 자세히 보면 약간 덜 감겨진 눈이 보인다. 이 둘에게는 도대체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

 

“하늘에서 솔개와 비둘기가 마주쳤습니다. 솔개는 비둘기의 비행고도보다는 높은 곳에서 아래를 향해 공격을 했고, 비둘기는 미처 솔개의 비행을 눈치 채지 못한 채, 공격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솔개의 일격은 비둘기에게 치명상을 입히지 못한 채 공중에서 추격과 도피가 계속되었습니다. 비둘기는 저공비행으로 솔개의 공격을 피하려고 사과 과수원의 나무 위로 가까이 날면서 솔개의 추격을 피하려고 했지만 추운 겨울 먹지 못한 솔개는 비둘기의 도피를 허락하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비둘기가 위험을 무릅쓰고 사과나무 밑으로 비행을 했습니다. 여차하면 사과 가지에 충돌해서 비둘기는 솔개때문이 아니고도 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비둘기는 그런 위험한 비행을 감행할 수 밖에는 없다고 생각한 듯했습니다. 솔개도 비둘기를 따라 사과나무 밑을 비행하고 곧 비둘기를 따라 잡았습니다. 막 솔개가 비둘기를 낚아채려 할 때 위기를 느낀 비둘기가 다시 상공으로 급상승하려다 둘은 사과나무 가지에 부딪히고 왼쪽의 건물 지붕에 다시 한 번 더 부딪히고는 이곳에 떨어진 것입니다.”

‘없는 목격자’의 진술이다. 아마 이 목격자의 진술이 사실에 근접한 것으로 보인다.

 

미그19기와 호넷 전투기와의 공중전을 연상한 것이 목격자의 진술과 얼추 비슷하지 않은가? 당연히 호넷 전투기가 이길 것으로 예상했었는데, 미그19기의 도피비행으로 결국 같이 추락한 결과는 의외의 결과가 아니고 무었인가? 솔개가 추운 겨울 주린 배를 안고 사냥을 하지 않았다면, 솔개는 과연 그 무리한 저공비행을 하려고 했을까? 솔개가 까마귀의 공격을 받는 모습을 본 경험으로는 솔개는 결코 무리하지 않았다. 집단적으로 공격을 하는 까마귀의 공격은 조직적이지 않아 한 마리씩 따로 떨어지는 경우가 있었다. 이 때가 아니면 솔개는 까마귀를 공격하지 않았다. 따로 떨어진 까마귀를 구하려 다른 까마귀들이 다시 솔개를 공격하지 않으면 따로 떨어진 까마귀는 혼비백산하여 도망을 갔다. 솔개는 결국 까마귀를 떠나지만 위엄을 잃지 않고 퇴각을 했다. 까마귀도 더 이상 집요한 공격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 솔개는 배고픔과 추위에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것이다. 못 먹어서 추위에 얼어죽는 위험이 욕심이 되었고, 이것이 삶과 죽음을 가른 것이다. 먹고 먹히는 생존경쟁아 의외의 결과를 빚은 것이다. 결국 모든 생물은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 죽음을 옆에 두며 사는 것은 아닐까? 산다는 것이 그저 적당히 살면 되는 것이 아님은 나이를 먹으면서 알게된 명제다. 명예욕이나 재산욕으로 그런 것이 아니라 단순한 생존만을 위해서 말이다. 생존을 위해 목숨을 거는 치열함을 느끼는 것은 우리들의 숙명일까?

 

“교회를 나서면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게 인생이지 않습니까?”

아침 저녁으로 듣는 목사님의 녹음 설교에서 들었던 이야기가 생각이 났다. 삶과 죽음이 바로 곁에 있으니, 오늘을 감사하며 살아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아무런 장례식도 없이 치워져야 할 미물인 솔개와 비둘기이지만, 그 둘의 주검은 이 아침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다.

둘의 주검을 같이 의자 위에 올려 놓았다. 서로 마주보게 하는 것이 옳은 짓일까 생각도 들었지만 공유한 죽음 앞에 두려울 게 무엇이며, 핑게될 게 무엇이 있을까 생각하니 둘의 시선을 마주보게 하고 싶었다. 이렇게 한 것이 이 둘의 장례식일 것이고, 둘의 시신은 썩기 전에 고양이의 밥이 되거나, 썩으면 내가 뒷 산 어딘가에 버릴 것이다. 둘의 삶을 반추하면서 오늘의 삶을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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