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이 작가가 발을 딛고 사는 세상일에 무관한 듯 혼자 놀면 글만 화려해질 수 있습니다. 세상일과 떠나 글만 살게 된다면 글은 혼자 잘난 맛에 표현이 화려해질 것입니다. 예술의 진정한 목적은 아름다움이라는 사람들을 일컬어 탐미주의자라고 부릅니다.
헬조선 속에서 허덕이는 젊은이들이 사는 세상과 아름다움을 추구한다는 작가들이 사는 세상은 같은 세상입니다. 부조리한 세상 속에서 아름다움을 찾아내는 심미안은 놀랍기는 하지만 부럽지는 않습니다. 심미안을 가진 그들은 세상의 부조리를 보는 정의안(정의를 구별할 수 있는 눈을 이렇게 부르기로 합시다)이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부조리를 아름다운 문학으로 설명하고 주장하고 설득하며 같이 아파하는 문학은 가능할 수 없을까요?
아니 에르노는 특별하게 분칠을 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원서를 읽을 능력이 없어 번역된 그의 글을 읽으면서도 가진 느낌입니다. 작가가 보거나 느끼거나 아는 세상을 자분자분 화려하지 않은 단어를 이용하여 알려줍니다. 마치 하루 세끼 밥을 먹어도 질리지 않는 것처럼 또 읽어도 읽게 하는 힘을 가진 글이라고 느꼈습니다. 대신 맛있다며 걸신들린 듯 읽지는 못합니다. 아니 에르노가 노벨문학상을 받은 이유를 설명할 능력은 안 되지만 왜 수상을 했는지는 알 수 있을 듯도합니다.
이 책은 작가가 2011년 선집 ‘삶을 쓰다’에 실렸던 글들을 추려서 재수록한 것이라 합니다. 삶이란 것이 뭐 특별한 것이 아님을 작가를 통해서 다시 확인합니다. 특별하지는 않지만 글에서 전하는 삶이 무미하거나 건조하다는 말은 아닙니다. 삶을 간단히 정의할 수 있는 말은 없을 겁니다. 자신감만으로 뭉친 삶도 없고, 부끄러움으로 점철된 삶만 있을 수도 없습니다. 이것저것 합치고 섞인 것이 삶일 것입니다. 그런 삶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썼기에 붙은 제목이라 짐작합니다. 책에 처음 나온 ‘카사노바 호텔’도 삶과 비슷합니다. 정사를 나눈 카사노바 호텔은 사랑을 얘기하는 장소가 되기도 하고 욕정의 장소이기도 하고 어머니가 입원한 병실로 겹쳐지기도 합니다. 환상이 거부되기도 하고 단지 성기만을 갈망하는 장소로 변하기도 합니다. 그렇게 “카사노바 호텔에는 뭔가가 있다”라고 작가는 설명합니다.
문학은 무엇일까? 작가는 누구일까? 문학과 작가를 이야기하면 적어도 그의 작품과 인품에서 아름다움과 품위 그리고 애정을 가진 인간을 찾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것이 정확히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인간 같지 않음은 우리의 본능이 알아차립니다. 아니 에르소가 삶을 대하는 시선에 공감이 갑니다.
악질이고 저질스러운 감정의 배설물 같은 글이 요사이 작가라는 계급장을 달고 튀어나옵니다. 상을 받은 작가의 작품을 읽어 보기나 한 것인지 의심이 갑니다.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했다고 작가라는 계급장을 붙였지만 작가는 작품으로 얘기하는 겁니다. 판사가 판결로 말하듯이, 작가는 향이 나는 글로 비판을 하는 것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글에서 악취가 진동한다면 글공부 다시 하는 것이 맞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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