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에 던져진 인간이란 참으로 왜소하게 보입니다. 부정한 권력에 대항하고, 사회 개혁에 투신하는 개인은 역사의 관점에서 볼 때 아무런 의미가 없어 보이기도 합니다. “계란으로 바위 치기다.” “공연히 힘 빼지 마라.” 많은 어른들이 충고라는 허울을 쓴 무력감을 강요했습니다. 아이들은 일찍부터 옥죄고 무장해제 당합니다. 자신의 세계관의 터를 알게 모르게 만들어 가는 시기가 청소년기입니다. 부모와 선생에게 반항하며 실패와 조그만 성취를 통해 게으른 무력감과 싸우고, 비겁한 변명을 거부합니다. 하지만 현실은 두꺼운 벽이라 달려들어도 얻는 것은 머리가 깨지고 손이 까지는 상처뿐입니다. 그 시절을 함께 울고 위로하고 결심하고 행동하게 한 것은 몇 안 되는 친구들이었습니다. 친구들과 어깨 걸어 뛰고 쉬며 걸었던 시절을 회상하며 둘러보는 이야기입니다. 그 시절 공간을 같이 했던 46명의 동급생을 기억하는 이야기입니다.
나치의 폭력과 유대인의 피해 참상에 대해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입니다. 해마다 독일에서는 유대인에 대하여 행사한 국가폭력에 대하여 국가를 대표하여 사죄를 하고 용서를 비는 행사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나치를 찬양하고 지난 과거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경우, 독일법은 처벌을 한다고도 들었습니다. 독일이 전쟁배상금을 물기 위하여 불평등조약을 체결하고 이로 인하여 독일 경제는 멍이 들고, 독일 국민의 자존감이 무너지며 경제적 어려움을 겪는 터에 나타난 히틀러는 국민의 열화와 같은 지지를 받으며 전쟁을 일으킵니다. 전쟁의 참상은 구체적인 표현물들을 통하여 이미 익히 알려졌습니다. 유대인들이 당한 피해는 이제는 타인을 괴롭히는 면죄부처럼 사용되기도 합니다. 시오니스트가 만든 이스라엘은 다른 민족의 터를 빼앗고도 공존을 거부합니다. 역사의 반복은 주체와 객체를 달리하며 세상 여기저기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책은 그런 이야기와 결이 다릅니다.
나치가 전쟁을 일으키기 전, 독일이 정치적으로 급격한 변화가 일어나는 것과는 달리 조용한 김나지움의 교실을 배경으로 한 두 친구의 이야기입니다. 독일 사회의 급변은 거의 이야기가 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숨쉬기가 자꾸 불편해집니다. 우리가 익히 아는 상황이라 굳이 얘기하지 않아도 두 친구의 대화와 행동에서 당시의 모순을 알아갑니다. 46명의 아이들 중 26명이 나치가 일으킨 전쟁통에서 누구는 러시아에서 전사하고, 누구는 아프리카 사막에서 실종되며 누구의 시체는 묻히기도 하지만, 더러는 시체조차 찾을 길이 없습니다. 유대인 출신 주인공과 독일 귀족가문 출신의 또 다른 주인공의 우정이 30년이 지나 다시 만나는 그때를 제목으로 사용했습니다. “Reunion”은 우리말로 재결합, 재회입니다. 소설의 한국어 제목은 ‘동급생’으로 정해졌지만 저는 영어 제목에 더 감정이 실렸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책을 읽으며 고등학교를 다니던 시절, 친구들을 기억하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책을 읽었습니다. 두 친구의 재회가 너무도 뜻밖이라 충격이었습니다.
바람직한 세계관이 허물어지던 그 시절, 태풍처럼 불던 부조리한 바람을 맞으며 키웠던 기대와 만났던 실망을 함께 했던 친구들이 다시 생각났습니다. 두 주인공의 다른 삶은 같은 길에서 재회한 것으로 보입니다. 우리도 그렇게 만나면 좋겠습니다. 좋은 책입니다.
'매일 에세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요즘 역사 근대. 황현필 지음. 역바연 간행. (15) | 2024.09.02 |
---|---|
내 남편. 모드 방튀라지음. 이세욱 옮김. 열린책들 간행 (7) | 2024.09.01 |
밤의, 소설가. 조광희 장편소설. 문학과 지성사 간행. (0) | 2024.08.26 |
잡동산이 현대사 1. 일상.생활, 전우용의 근현대 한국 박물지. 돌벼개 간행 (0) | 2024.08.21 |
치매 진행을 늦추는 대화의 기술. 요시다 가즈야키 지음. 전지혜 번역 (0) | 2024.08.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