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에세이

서사의 위기. 한병철 지음. 최지수 옮김. 다산초당 간행

무주이장 2024. 5. 8. 16:51

 책의 제목을 이해하는 것이 필요할 듯합니다. 서사, 즉 이야기란 무엇인가? 서사는 스토리와는 무엇이 다른가? 스토리텔링은 이야기하기와 무엇이 다른가? 정보와 이야기는 무슨 차이가 있는가?

 

 스마트한 지배에 예속되어 억압도, 저항도 없이 삶을 게시하고 공유하고 좋아하도록 지배당한다고 하면서 새롭고 자극적인 뉴스거리가 넘쳐나는 시대, 이슈에서 이슈로 빠르게 이동하는 사람들, 스스로 자기 존재를 정보로 전락시키는 사회에서 개인은 각자의 이야기, 즉 서사를 잃고 우연성에 휩싸인 채 폭풍우 한가운데서 부유한다며 저자는 현실을 비판합니다. 정보 과잉 사회는 스토리텔링을 외치지만 자신의 이야기를 전시하듯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에 찰나의 장면들을 끊임없이 공유하고 공감 버튼을 누르지만 그 안에 의미는 없다며 이는 사라져 버릴 정보에 불과하다고 설명합니다. 무언가를 끝없이 공유하고 타인과 교류하면서도 고립감을 느끼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합니다. (6~9)

 

 서사, 즉 이야기는 세상으로부터 충격받고 저항하고 간극을 느끼며 자신만의 철학을 쌓아 올릴 기회를 주지만, 스토리, 스토리텔링, 정보는 그렇지 못하고 그저 좋아요를 외치게 만든다고 합니다. 저자가 말하는 스토리는 정보라는 말로 대체됩니다. 정보는 끊임없이 등장하는 다음 스토리로 대체되어 사라지는 반면 서사는 나만의 맥락과 이야기, 삶 그 자체다라고 분별합니다. 이제 책의 제목을 얼추 이해하셨을 것으로 믿습니다.

 

 저자가 걱정하는 서사의 위기는 정보화 시대에서는 당연한 논리적 귀결이며 이제는 체화된 지식임을 강조하는 분들도 있을 듯합니다. 저자가 걱정하는 서사의 위기는 시대착오라고 생각할 법도 합니다. 방송국에서 근무하는 사람들을 예능에서는 “방송국 놈들”이라고 부릅디다. 관심을 끌 정보가 되면, 새로운 이슈가 된다면, 전에는 못 본 소식이라면 개인의 사정은 약간만 고려하(는 척하)고 날름 사용하는 태도가 상습적인 직업인을 그렇게 부르는 게지요. 불신과 불화가 일상화되는 이유는 이제는 '방송국 놈들'만 조심할 게 아니라 관심을 끌 수만 있다면 정보를 끊임없이 올리는 유튜버들, 인스타들, 블로거들 때문이겠지요. 매일같이 텔레비전과 OTT와 유튜브, 인스트그램, 블로그에서 볼거리를 찾아 배회하면서 많은 시간을 타인의 정보에 접속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저자가 지적한 대로 고립감을 느끼지는 않습니까? 스토리 중독 시대에 서사의 위기가 있다고 저자는 강조합니다.

 

 그러면 서사의 위기를 느끼는 사람은 철학자에 국한할까요? 소설가의 이야기를 들어보겠습니다. 다른 책 다른 이야기에서 같은 위기를 말하는 분이 있습니다. 어떤 방송국 PD의 이야기입니다.

 

 “나는 아무도 없는 편집실에 앉아서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를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들어, 처음에는 이야기를 따라가지만, 나중에는 감정의 흐름을 지켜봐. 그럴 때면 그들의 인생이란 이야기에 있는 게 아니라 그 이야기 사이의 공백에 있는 게 아닐까는 생각마저 들어. 그런데 편집은 목소리 사이의 공백을 없애는 일이잖아. 목소리와 목소리 사이에서 기침이나 한숨 소리, 침 삼키는 소리 같은 걸 찾아내서 없애는 거야. 그러면 이상하게 되게 외로워져. 그런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가 릴테이프를 잘라내면 외로워진단 말인데, 저게 뭐지?” 그렇게 해서 편집이 다 끝나고 방송이 흘러나올 때면 그녀는 자신이 직접 만나서 들었던 바로 그 인생담이 아닌 것 같다는 느낌에 번번이 좌절했다. (김연수 소설집, 세계의 끝 여자친구 중 달로 간 코미디언’ (236~237))

 

 철학자의 위기감을 소설가도 느끼나 봅니다. 그럼 서사의 위기를 극복하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저는 일단 책 읽기라고 생각하겠습니다. 이야기를 따라가면서 감정의 흐름을 지켜볼 수 있고, 남의 이야기를 함부로 재단하지 못하는 방편 중 하나이지 않을까요? 그런데… 책을 읽고 이렇게 서평을 적는 것은 작가의 의도를 편집, 변질시키는  짓은 아닐까? 갑자기 겁이 났습니다.

예스24에서 가져온 이미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