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의 끝, 땅의 귀퉁이와 그 상처가 칼날의 생김새를 닮듯
작가는 템즈 강변에서 뭉게구름을 보면서 어린 시절의 기억을 떠올렸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책이 오랫동안 잊고 살았던 뭉게구름 같은 것이어서 어린 시절의 기억을 떠올리게 하면 좋겠다고 합니다. 모두 9편의 작품은 저를 어린 시절로 데려갔습니다. 토끼굴로 들어간 엘리스처럼 잊혔던 세상, 없는 줄 알았던 세상을 마음껏 쏘다녔습니다. 그 세상의 사람들은 무조건 나에게 친절하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모질게 나를 외면하지도 않았습니다. 맹숭맹숭한 세상으로 기억했는데 사실 그렇지 않았습니다. 가슴이 콩당콩당 뛰고, 얼굴이 괴란쩍기도 했지만 되돌아 간 세상은 지금의 나를 만드느라 부산스러웠고 뜨거웠습니다.
13 가구가 들었던 기와지붕을 같이 한 집입니다. 빙 둘러 지어진 집은 방 하나와 부엌이 기본이었고 주인집만 방이 둘이었습니다. 한 집이 부부싸움을 하면 다른 집이 싸움을 지켜보다 여차하면 득달같이 달려들어 싸움이 가지 못할 몹쓸 길로 저 혼자 새지 못하도록 말리던 한 지붕 13 가구였습니다. 어린아이가 어느 집에 무슨 사정이 있는지 어찌 알겠습니까 만 오도 가도 못할 아이를 거두는 집도 있었고, 마음과는 달리 오래 거두지 못하는 경우도 보았습니다. ‘하늘의 끝, 땅의 귀퉁이’를 외로이 돌던 경자는 그때도 있었습니다. 생사도 모르고 어디서 잘 살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돈을 훔쳐 달아난 경자를 찾아 나선 어른들이 애먼 할아버지의 컬러텔레비전을 빼앗아 흠뻑 내리는 눈길을 돌아 나오는 모습은 낯설지 않은 서러운 장면이었습니다. 조금 더 젊은 사람, 조금 덜 가진 태식은 말합니다.
“이거 꼭 가져가야 되겠습니까?” 두 번을 묻는 태식에게 김 씨는 대답을 않습니다. 바람이 대신 답을 합니다. 가는 수밖에 없다고. 가난이 사람을 서럽게 하던 세월이 기억났습니다.
상처를 보고 도구를 확인하는 작업은 수사 기관의 업무입니다. 이 직업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해도 이제는 상식이 되었습니다. 과학이 수사와 합쳐진 결과이고 이야기로 풀어 만든 것들로 차고 넘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어린 시절 그런 줄 몰랐습니다. ‘그 상처가 칼날의 생김새를 닮듯’ 상처를 들여다보고 흉기를 생각할 여유가 그 당시에 누가 있었겠습니까? 어른이라고 해서 다를 바가 없었을 것입니다. 제 살기에도 뒤뚱뒤뚱 똥 마려운 사람이 변소간 찾든 황급한 상황인데 다른 집 사정을 둘러볼 여유가 어디 있나요? 그러니 어린아이들도 제대로 못 배운 것이지요. 그래도 사춘기라도 겪을 여유가 있었던 언니는 광주에서 사람들이 죽어갈 때 늦둥이 동생을 만든 아버지를 비난합니다. 적어도 사람들이 죽어갈 때 그 짓만은 하지 않고 슬퍼하는 아버지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 언니도 나이 들자 아버지에 대한 원망을 거둡니다.
아버지의 무력감을 이해했던 어머니가 남편을 위로하여 품에 안았던 그날 하필이면 아이가 생겼고 그 아이는 아버지의 무력감을 유전자에 새겨 아픈 몸으로 태어납니다. 그 아이를 돌보려고 아버지를 비난하던 언니는 간호사 공부를 하지요. 세상 사는 것이 뭣 하나 우리 마음대로 되지 않았던 시절, 효능감이라고는 무엇 하나 가질 수 없었던 무력하던 그 시절을 살아냈던 아버지 어머니가 생각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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