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에세이

암컷들(BITCH). 루시 쿡 지음. 조은영 옮김. 웅진싱크빅 간행 1

무주이장 2024. 2. 16. 17:26

자연의 얼굴을 덮는 이론의 가면을 벗기는 방법: 호시우행

 

 초등학교부터 중학교를 다니면서 정의사회 구현’, ‘평등 사회 실현이란 구호가 육교 난간에 간판으로 붙은 이유를 제대로 알지 못했습니다. 고등학교 1학년 EDPS를 가르치시던 선생님의 가르침이 있고서야 알았습니다. 선생님은 새마을 노래의 가사를 소개하면서 잘 살아 보세 잘 살아 보세 우리도 한번 잘 살아 보세노래를 하셨습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구국의 영웅이기도 한 박정희가 직접 지은 가사라고 합니다. “얼마나 우리가 못 살았으면, 한 번도 잘 살아 본 적이 그렇게도 없었으면 노래를 지어 불렀겠나?” 선생님의 설명이었습니다. 희망을 이야기하지만 진실은 엄혹한 가난의 바퀴에 끼여 있었습니다.  

 

그랬습니다. 우리가 간판으로 만들어 육교 난간에 건 것은 우리 시대의 소명이었고 문화였습니다. 또한 우리의 소망이고 열망이었습니다. 간절한 소망과 열망을 우리 정부가 이뤄줄 테니 잔말 말고 우리를 의심하지 말고 따르라는 유혹이었습니다. 우리는 소망과 열망, 소명과 문화에 충실히 따랐습니다. 모든 일에는 장점과 함께 단점도 있는 것이 세상 이치입니다.  우리의 소망과 열망에 눈멀어 구호를 외치던 그들이 먼저 자신들의 소망과 열망만을 열심히 수확하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정의와 평등은 자신들만의 전유물로 전락하고 있었습니다. 알아채지 못한 우리들 지성의 부족은 지금도 수정되지 못한 유전적 결함일 수도 있을 듯합니다.

 

 과학에 관한 책을 리뷰하면서 이런 이야기로 시작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저자 루시 쿡은 과학이 동물의 암컷을 얼마나 왜곡해 왔는지를 쓰고 싶어 했습니다. 막연하게 과학이란 당연히 과학적일 것이라 생각하며 살았는데, 저자가 대학에서 복음처럼 배운 진화생물학의 기본 개념들이 편견에 의해 왜곡되어 왔다는 사실에 충격적 깨달음을 얻고는 자신의 편견에 맞서게 된 당연한 귀결입니다.

 

 저자는 우리가 개인적 인지의 족쇄에서 벗어나 동물의 세계를 진정 공정한 눈으로 볼 수 있는지가 궁금해졌다고 합니다. 빅토리아 시대의 학계에서도 과학 지식이 사회적으로 형성된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윌리엄 휴얼은 다윈이 인간의 유래와 성선택을 출간하기 30여 년 전에 과학에 대한 많은 철학적 사색에서 이를 경고한 바 있습니다. ‘자연의 얼굴 전체를 덮는 이론의 가면이 있다…… 우리 대부분은 바깥 세계의 언어를 읽으면서 자신의 언어로 번역해서 읽는 영구적인 습관을 의식하지 못한다.’(441~442)

 

 이 가면을 벗기는 것이 그토록 어려운 것은 그것이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두 깊이 각인된 개인적 이해의 틀 안에서 세상을 문화적으로 해석하도록 적응되었습니다. 이런 확실성의 안전한 그물 밖으로 나오려면 먼저 그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하고 그런 다음에 자신의 깜냥이 부족하다는 것을 받아들이면서 앞으로 계속 나아갈 만큼 용감해져야 한다고 저자는 주장합니다. 대단할 것 같은 생명과학의 실패를 저자는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세상을 살면서 우리가 시대정신을 이야기하고, 철학자의 이야기를 듣는 것은 세상을 이해하고 그 세상 속에서 떳떳하게 살고 싶은 욕망 때문이라고 믿습니다. 우리의 욕망은 인간의 본성에 대한 이해가 전제되어야 할 것입니다. 절대적 가난을 극복하려고 애썼던 그때는 흘러간 옛 노래가 되었습니다. 구호로만 외치던 정의와 평등은 현실에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났는지 확인하며 형질을 바꾼 지능도 이미 사회적 적응을 통해 유전되었습니다.

 

 한때 유행했던 말 중에 호시우행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호랑이의 눈, 소의 우직한 걸음걸이를 말하지요. 동물의 암컷에 대한 오해는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하였지만 당대의 문화와 문명이 가면을 씌웠던 비과학적 사실이었습니다. 이런 비과학적 사실을 우직하게 살피고 연구하여 마침내 밝혀진 사실들을 이 책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암컷에 대한 연구가 남성우위사회를 위협하고 페미니즘을 확대한다며 사실을 왜곡한 것은 비과학적이지만 인문학적으로는 비유와 예시의 거울에 비치면 우리 사회를 이해하는 과학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스24에서 가져온 이미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