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네가 되는 꿈을 응원할게
교회를 갈 준비를 합니다. 오늘따라 교회를 가는 일이 거북합니다. 아이가 전한 이야기를 아내를 통해 들으면서 힘이 빠진 게 분명합니다. 화성의 동굴에서 해법을 찾는 것에 익숙한 남자는 힘이 빠졌습니다. 갈까 말까 망설입니다. 금성에서 공감과 투사에 익숙한 아내는 벌써 교회 갈 준비를 착수했습니다. 동굴의 외로움을 알기에 따라가기로 정합니다. 씻으려고 준비하는데 아이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이미 아내를 통해 들었던 이야기를 아이가 시작합니다. 열심히 듣습니다. 아이가 얘기하는 중간중간에 추임새도 넣어보고, 나의 의견도 조심스럽게 얘기합니다. 아이가 내 의견에 관심을 두지 않으면 개켜 한쪽으로 밀어 두고 나의 이야기에 관심을 두면 가능한 아이가 관심을 가질 법한 단어를 사용하여 이야기를 합니다. “아빠, 일단 들어 봐”라고 하면 다시 입을 닫고 듣습니다. 세상 이야기에 많이 익숙한 늙은 아빠가 아이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새삼스럽거나 흥미를 유발하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심드렁하게 듣는 것은 금방 아이에게 들킵니다. 많이 경험하였습니다. 오늘 아이와의 통화는 계속 이어졌습니다.
아이의 이야기를 듣는 태도에 변화가 있습니다. 아이도 변했지만, 제가 듣는 태도에 변화가 있습니다. 사실 이제는 아이의 이야기가 진부하지는 않습니다. 듣다 보면 아이의 이야기 속에 사람들의 감정이 움직이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변하는 사람들의 감정은 역사를 만들고 사건을 만들고 사고를 치게 합니다. 딸칵하고 순간 켜진 불꽃은 어떤 때는 큰 화재로 이어집니다. 꺼진 불씨를 제대로 확인하지 않으면 다시 불길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사람의 감정은 불씨입니다. 불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는 우리의 유전자에 분명히 각인이 되어 있습니다. 불은 위험해, 불은 필요해, 불을 무시하지 마 등등.
작가는 어린 시절의 자신과 어른이 된 자신 사이에 무수히 많은 자신을 인식하고 있습니다. 자기는 혼자가 아니었다는 말을 합니다. 열 살의 이태희, 열다섯 살의 이태희, 스무 살의 이태희... 그런 태희는 자신에게 상처를 준 사람들을 기억합니다. 초등학교 담임선생은 시골 촌구석의 교사로서 패배의식에 짓눌려 있습니다. 그는 불만을 아이들에게 전가하면서 가정환경을 들먹입니다. ‘이런 촌구석에서 100점 맞아 봤자’와 ‘이런 촌구석에서 공부까지 못하면’을 뒤섞어서 아이들의 미래를 저주합니다. 태희는 졸업식을 하고는 담임선생의 차 본넷 위에서 똥을 쌉니다. 태희는 “내가 되려는” 꿈을 포기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시골 촌구석의 별 볼일 없는 선생, 선생 똥은 개도 먹지 않는 그런 촌구석 선생에게서 “내가 되는 꿈”을 뺏기기 싫어합니다. 본능적입니다. 그러니 똥을...
외할머니와 함께 한 세월을 이야기하면서 주변의 사람들을 기억합니다. 외할머니, 이모 그리고 별거 중인 아빠와 엄마, 이들은 어른이 되어 저렴한 직장 생활을 하는 자신의 비루함의 원인인 듯도 합니다. 뿌리가 있는 태희의 비관적인 태도는 체화된 듯합니다. 그래서 비관적인 태희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면서 마음에 들지 않는 상사의 괴롭힘에 대응하지 못합니다.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 남자와의 이별도 쉽게 결심하지 못합니다. 자기만을 사랑하는 남자를 사랑하는 자신의 무기력은 이미 어릴 때 익숙해진 비관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런 태희가 “내가 되려고” 시작한 이야기가 이 소설입니다. 그녀가 내가 되는 꿈을 방해하는 사람들의 차, 본넷에 똥을 사는 이야기입니다. 이야기는 똥을 싼 이야기에서 그치지만, 그 뒤의 태희 이야기는 이어질 것입니다. 태희의 다음 이야기는 사뭇 다른 이야기로 전개될 것입니다. 그렇게 믿습니다. 다시 비관의 웅덩이에 빠지기도 하겠지만, 거기서 허우적대기만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한참을 이야기하던 아이가 애초 전화를 한 이유에서 벗어난 모양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과거 서울시장을 했던 고건 씨는 흥분한 시민들이 시장 면담을 요청하면 시장실로 모시고 와서는 그들의 이야기를 끝날 때까지 들었다고 합니다. 세상 문제를 요약해서 이야기하면 대부분 10여분이면 정리가 되지만 그 문제에 얽혔던 사람의 감정은 대하를 이룬다고 표현합니다. 그래서 억울한 사람들은 자기 이야기를 쓰면 대하장편이 된다고 관용적으로 표현합니다. 그 대하장편의 이야기를 고 시장은 입을 닫고 듣기만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이야기를 하던 민원인들은 해법을 듣지 않고도 마치 문제가 해결되기라도 한 것처럼 조용히 시장실을 나갔다고 합니다. 고건 시장은 그들의 이야기를 사람의 감정 중심으로 들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오늘 아침 아내에 이어 제가 받았던 아이의 전화에서 혹시 아이의 꿈을 방해한 말은 없는지 되돌아봅니다. 아내가 아이의 이야기를 전하는 과정에서 혹시 아내의 꿈을 방해한 것은 없는지도 생각해 봅니다. 소설의 주인공 이태희가 오며 가며 알지도 못하는 저에게서 자신의 꿈이 위축되지 않았는지도 생각해 봅니다. 그때 새로 산 내 새 차의 운전석 문의 열쇠구멍에 이쑤시개를 박아 넣은 것이 나에게 상처 입은 다른 이태희가 아니었는지 생각합니다.
최진영 작가의 소설이 아내와 아이의 꿈을 귀하게 여기게 하고 그들의 꿈을 지원하고 지지하려는 저에게 보내는 응원이 된 것 같습니다. 작가의 응원에 감사를 드립니다. 고맙습니다.
교회는 가지 못했습니다. 예수는 아이의 모습으로도 나타나지 않습니까? 아니 이건 관세음보살이 다름 얼굴로 나타난다는 이야기의 변용인가요? 글이 이상하니 그쳐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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