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에세이

악의 평범성. 이산하 시집. 창비시선453. 1

무주이장 2024. 1. 18. 16:18

 시인의 이름이 풍기는 기운이 남다릅니다. ‘산하라는 이름이 본명이라고 보기에는 어렵다고 생각했습니다. 시인의 나이로 견주어 보면 아버지 세대가 산하란 이름을 지어 주시기에는 시대가 엄혹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가 되어서야 알게 되었지만 자식이란 것이 이름 때문에 굴곡진 삶을 살지도 모른다는 걱정 때문에 이름을 지을 때는 이것저것 생각이 많아지기 마련입니다. 혹여 관재수를 끼고 살아야 할 이름을 지었다면 이것처럼 낭패를 느낄 아버지의 고통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자식들이 크면서 아비의 뜻대로 사는 경우가 어디 그렇게 흔하겠습니까? 그렇다고 아비의 뜻을 따른다면 아비의 그릇 이상으로 자랄 수도 없을 것이니 아비 된 입장에서 다만 이름에라도 어떤 액운이 없길 바라며 이름을 지을 따름일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지 못했던 모양이다. “오늘은 내 구속 충격으로 심장마비로 떠난 아버지의 기일이다” (지퍼헤드 2 중에서)

 

 세상의 일이 돌아가는 것에 시인은 불만도 많고 실망도 많았을 법합니다. 청년의 끓는 피를 식히지 못하고 가슴속에서 차오르는 단어들을 내뱉고는 차가운 창살에 갇혔습니다. 아비가 자식의 재주를 미리 알고 단속을 했다고 해서 달라지지 않았겠지만, 그래도 답답한 마음을 견디지 못했던 모양입니다. 분명 알았다면 말렸을 것인데, 아들의 재주를 칭찬할 수 없는 아비는 억장이 무너지고 가슴이 답답했을 것입니다. 이름을 잘 지었다면 아들의 운명을 바꿀 수 있었을까? 아비는 물어도 얻지 못할 답이 답답해서 그렇게 숨을 거뒀을지도 모릅니다. 시인의 시들을 읽으면서 이만큼이라도 바뀐 세상에 대한 희망을 얘기하기 꺼려졌습니다. 시인에게 빚진 마음에 쉽게 말할 수 없어 괜히 이름에 대한 이야기로 글을 시작했던 모양입니다.

 

멀리 있는 빛

 

 시인은 우리 시대의 꿈은 90%가 자본의 덫이다라고 현실을 갈파합니다. 시인이 씨앗 대신 스스로의 장례를 치르면서까지 만들려던 세상은 자신들의 바람대로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감옥에 박경리의 대하소설 토지한 질을 보냈”던 친구는 모두 장밋빛 꿈의 복선을 적당히 깔며 정서적 타협을 할 때” “그런 위선과 기만을 거부했”습니다. 시인은 친구가 보내준 책을 전부 바닥에 펼쳐놓고 토지로 변한 작은 독방에서 씨앗을 뿌리는 대신 자신을 뿌리며 장례식을 치렀습니다. 그런 시인이 친구와 함께 자본의 덫에 걸린 꿈의 장례식을 치를 준비를 하면서 소망을 얘기합니다.

 

이번 기일에는 장밋빛 미래의 덫에 걸린 모든 영혼들을 불러 모아 그 광활한 토지에서 다시 장례식을 치르고 싶다” “그날의 상주는 입속의 검은 잎이고 문상객은 잿더미들이다라고 한탄합니다.

예스24에서 가져온 이미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