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에세이

붉은 빛이 여전합니까. 손택수 시집. 창비시선440. 1

무주이장 2024. 1. 1. 12:42

  인위적으로 정한 나이테는 달력에서만 보입니다. 그 달력도 떼어지면 사라지는 듯하지만 기록이 있어 세월을 돌아볼 수 있습니다. 시인의 시도 세월을 따라 변하겠지요. 금년에도 시집을 읽으며 섬세함을 배우고 세상을 읽는 따뜻함을 계속 배우고 싶습니다. 이번 시집은 손택수 시인의 시집입니다.

 

  송종원의 해설에 따르면 “시를 말하면 우울감을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지만 그런 시는 사실 반쪽짜리 시일뿐이다. 손택수의 시처럼 삶의 기쁨과 경이를 외면하지 않고 나아가는 감각이야말로 시가 꾸는 꿈이고 실제이다.” (117쪽) 시를 읽으면서 우울한 마음보다 기쁨과 경이를 느끼는 시간이 많으면 좋겠습니다.

 

먼 곳이 있는 사람

 

  언제부턴가 걷는 것이 편하게 되었습니다. 버스를 타고 카드단말기에 교통카드를 인식한 후 사람들과 어깨를 같이 하는 편한 길이 불편합니다. 내가 버스를 타면서 벌었다는 시간을 쓸 곳이 없어져서 그런 것일까 자문합니다. 지병의 흉터가 심하지 않게 되길 바라게 되면서부터인가도 물어봅니다. 버스를 타면 보이지 않던 풍경들이 걸으면 볼 수 있어서 그런 건지도 모를 일입니다. 눈으로 보면 가슴은 생각하지요. 저기 달린 간판 하나조차도 세세히 읽고 보고 만든 이의 바람을 짐작하게 합니다. 이런 저와 달리 시인은 생각하는 듯합니다. “기대 내지 희망과 접속한 더딘 시간조차 편의로 포장해 강탈하는 세력들에 대한 분노”라고 송종원은 해설합니다. 시인이 걷는 이유입니다.

 

걷는 사람은 먼 곳이 있는 사람

잃어버린 먼 곳을 다시 찾아낸 사람

걷는 것도 끊는 거니까

차를 끊고 돈을 끊고

이런저런 습관을 끊어보는 거니까

묵언도 단식도 없이 마침내

수행에 드는 사람

걷는 사람은 그리하여 길을 묻던 기억을 회복하는 사람

길을 찾는 핑계로 사람을 찾아가는 사람

모처럼 큰맘 먹고 찾아가던 경포호가

언제든 갈 수 있는 집 근처

호수공원이 되어버렸을 때를 무던히

가슴 아파 하는 사람

올림픽 덕분에 케이티엑스 덕분에

더 멀어지고 만 동해를 그리워하는 사람

강릉에서 올라온 벗과 통음을 하며

밤을 새우던 일도 옛일이 돼버리고 말았으니

올라오면 내려가기 바쁜

자꾸만 연락 두절이 되어가는

영 너머 먼 데를 잃고 더 쓸쓸해져버린 사람

나는 가야겠네 걷는 사람으로

먼 곳을 먼 곳으로 있게 하는 사람에게로

먼 곳이 있어 아득해진 사람에게로

예스24에서 가져온 이미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