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에세이

겨울방학. 최진영 소설. 민음사 간행 2

무주이장 2023. 12. 30. 05:17

돌담

 

  어린이용 장난감을 만드는 회사를 4년 넘게 일했던 그는 회사가 ‘프탈레이트 가소제’를 상습적으로 사용한다는 것을 알리고 회사를 그만둡니다. 그는 이 사실을 알리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그가 이미 부당하게 일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잊고 싶지만 월급이 통장에 찍힐 때마다, 사장이 돌돌 만 신문으로 그의 정수리를 치며 고함칠 때마다, 죄짓듯 휴가를 쓰고 명절 직원 선물로 남성 양말 세트를 받을 때마다 그는 모욕감을 쌓았다고 합니다. 돌담을 쌓듯.

 

  돌담은 이질감을 가르는 상징입니다. 한 마을에서 거의 모든 정보를 공유하며 살던 사람들이 뉘 집에는 이 빠진 그릇이 몇 개인지도 아는 마을에서 일어난 사고로 딸을 잃은 부모에게 위로하는 이런저런 말들 속에는 절대로 하지 말아야 하는 말도 섞여 함부로 날아다녔습니다. 위로를 가장한 나쁜 말들이 이웃이라는 자격으로 위로라는 가면을 쓰고 딸을 잃은 부모에게 날아갔습니다. 화살처럼 칼처럼 총알처럼 부모의 가슴을 뚫었습니다. 상처 입은 그들은 없던 담을 쌓았습니다. 돌담을 쌓았습니다.

 

  그저 돌담을 쌓았습니다. 돌담을 사이로 더 이상의 교류는 단절됩니다. 돌담을 허물 수 있을 때를 작가는 알려주지 않습니다. 허물 수 있을지도 알려주지 않습니다. 그의 섬세함은 다른 주장을 하지 않습니다. 그저 알려만 줍니다. ‘그렇지?’하고 동의를 구할 뿐입니다.

 

 

겨울방학

 

  생각지도 못했던 동생이 태어나면서 고모집에서 겨울방학을 보내는 아이의 이야기입니다. 동생으로 엄마가 아픈 것도 싫었고, 아빠 손에 이끌려 고모집으로 오게 된 것도 불만입니다. 하물며 고모집은 집도 작고 신발장도 없어 작은 현관에 놓인 신발에서 냄새가 나기까지 합니다. 푸르지오나 이 편한 아파트가 아닌 것도 심통이 납니다. 텔레비전, 소파, 탁자, 식탁, 정수기, 오븐, 스피커, 공기청정기, 김치냉장고, 드럼 세탁기, 세탁실, 화분, 쿠션, 로봇 청소기, 다른 방, 하늘이 보이는 베란다. 고모집에 온 이나가 고모 집에 없는 것들을 찾아봅니다.

 

  이나는 고모와 손을 잡고 산책을 하고, 화장품 가게에 들러 화장품 구경도 하고, 고모 집 옆 동네 아파트 단지 안에 있는 놀이터에서 놀기도 합니다. 잠을 자다 오줌이 마렵지만 화장실을 혼자 가기가 무서워 울면 고모가 깨 불을 켜고 왜 우는지 물어봅니다. 고모가 가난한지 아닌지 묻기도 합니다. 좋아하는 젤리를 내일도 사 줄 수 있는지 고모의 가난을 의심합니다. 엄마에게 전화가 올 때마다 이나는 동생 유나에게 사랑한다고, 보고 싶다고 인사를 합니다. 진심은 아니었지만 그렇게 말해야 엄마가 안심하니까 그럴 뿐이었습니다.

 

  고모는 이나와 롤러스케이트장에도 놀러 가고,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저녁도 삽니다. 피아노도 같이 배우러 갑니다. 매일 깨끗이 씻고 깨끗한 옷을 갈아입고 집에서 정해진 시간 동안 일을 하던 고모는 이나와 함께 하면서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고모는 조카 이나가 자기에게 배운 것이 가난만은 아니라면 좋을 텐데 혼잣말로 염려합니다. 이나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몰랐다고 쏟아지는 잠 때문이었다고 말합니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되는 말인데도 그렇게 말을 합니다.

 

  이나는 고모와 큰 서점 구경도 가고 보드게임 카페에서 게임을 하고 만화방과 목욕탕에도 가고, 직업 체험 프로그램을 신청해서 다녀왔습니다. 같이 김밥을 말아먹고 만두를 빚어 먹었습니다. 기차를 타고 바다도 가고 대형 마트의 문화센터를 돌아다니기도 했습니다. 이나가 감기에 걸려서 나흘 동안 집 밖으로 나가지 못했을 때는 모형 비행기를 만들고 직소 퍼즐을 맞추며 놀았습니다. 고모는 아이처럼 질문하고 웃고 어지럽혔습니다. 어른처럼 침묵하고 치우고 늦게 잤습니다. 고모가 자기와 놀기를 선택한 순간부터 이나는 고모의 가난을 생각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냄새가 날 것 같은 신발도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아이의 섬세함과 아이를 돌보는 고모의 섬세함이 소설의 처음과 끝까지 이어지면서 마음이 푸근해집니다. 이런 관계가 아직도 살아있다는 사실을 잊고 살았습니다.

예스24에서 가져온 이미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