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은 만원이다’ ‘서울은 돈만 있으면 천국이다’ 청년시절 늘 듣던 서울의 얼굴이었습니다. 서울의 달을 이고 가난하게 살았던 마을은 이제 거의 모두 아파트 단지로 변했습니다. 출근길 신문을 사려고 돌아서는 순간, 성수역을 향하는 군중에 부딪혀 당황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가는 길을 거스른 저를 향한 비난의 눈을 잊지 못합니다. 그 눈빛에 튕겨 저는 서울에서 젊은 시절 짧게 있다가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조선시대 한양이니 구경할 거리도 많았을 텐데 그때는 광화문도 창덕궁도 덕수궁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항상 유심히 보았던 것이 있었으니 서울역을 나오면 보이던 숭례문입니다.
서울역에 처음 온 날 자연스럽게 고개가 젖혀졌던 고층건물과 함께 도로에 갇힌 남대문을 처음 보았습니다. 숭례문이라는 고상한 이름은 당시 쉽게 불리지 않았습니다. 그날 이후 서울을 기억하면 대우빌딩과 숭례문이 자연히 떠올랐습니다. 대우빌딩은 지금도 여전히 큰 사고 없이 그 자리에서 주인만 바뀐 채 버티고 있는데, 숭례문은 한 차례 봉변을 당했습니다. 2008년 설날 연휴에 토지보상에 불만을 품은 자가 숭례문에 불을 놓아 홀랑 다 탔습니다. 외적의 침입으로 손상을 입은 적은 있었겠지만 토지보상금이 적다고 애먼 숭례문에 불을 지른 것은 남대문도 예측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시인의 숭례문에 대한 기억에 무심할 수 없었습니다.
숭례문
내가 소년이 되어 무작정 서울역에 처음 내렸을 때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서울역 시계탑 아래를 서성거렸을 때
서울역 광장 비둘기들만 나를 멀뚱멀뚱 쳐다보고 있었을 때
아버지처럼 달려와 두 팔을 벌리고 힘껏 나를 안아주던
내가 청년이 되어 마음의 고향을 찾아 처음 서울역을 떠났을 때
결국 고향을 만나지 못하고 울면서 다시 서울역으로 돌아와
하염없이 비를 맞으며 갈 곳을 잃었을 때
어머니처럼 살며시 다가와 나를 품에 꼭 껴안아주던
내가 노년이 되어 이제는 아무 데도 갈 데가 없었을 때
그리운 벗들도 떠나고 기어이 늙은 아내마저 떠나
공연히 지하철을 타고 서울역에 내려 먼 하늘을 바라볼 때
명동성당에 가면 만나는 그 야윈 사내처럼 다가와
내 굽은 어깨를 다정히 토닥여주는
마침내 인생이 나를 버릴 때에도 나를 버리지 않는
서울에 사는 가난한 사람들이 모두 손을 잡고
봄이 오는 서울의 새벽 거리를 걸으며 아리랑을 부를 때에도
손수건을 꺼내 말없이 서울의 눈물을 닦아주는
이렇게 시로 숭례문을 만나니 서울이 정다워집니다. 한 번도 서울이 정다운 적이 없었던 저로서는 시 한 편에 서울을 좋게 생각하게 되니 시는 사람의 마음속을 굳게 닫아 건 자물쇠를 열게 하는 열쇠인 게지요. 주말 시간을 내어 숭례문을 보러 가고 싶습니다. 남대문시장도 들러 호떡도 한 장 사서 먹어보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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