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영화 보기를 좋아합니다. 닥치는 대로 봅니다. 그러다가 지루한 영화를 본 시간과 돈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면서 주연 배우나 조연 배우를 확인하고 영화를 봅니다. 이젠 감독도 조금은 확인합니다. 그렇지만 여전히 닥치는 대로 보는 편입니다.
책을 고를 때도 비슷한 것 같습니다. 책을 고르면 바로 읽기를 시작합니다. 유명 작가일 경우, 한결 같이 좋은 작품만 나오라는 법도 없고, 신인 작가라고 해서 좋은 작품이 영 없을 것은 아니기에 책을 열고 읽습니다. 책을 읽은 후에야 작가의 약력이나 성장배경을 확인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들의 눈은 신을 보고 있었다(Their Eyes Were Watching God)’ 이 책의 작가도 책을 다 읽은 후 확인하였습니다.
Zora Neale Hurston은 1891년/1901년~1960년의 생멸기간을 가진 작가입니다. 흑인이고 여성입니다. 작가의 작품은 발표 당시에는 관심을 받지 못하다가 1970년대 들어 흑인 여성 문학의 전통에서 선구적 위치에 자리매김되었다고 합니다.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그녀의 작품은 미국 대학의 교양 필독서 중 하나로 꼽혔고요. 이렇게 나이 드신 분인지 몰랐습니다.
흑인은 인종차별을 경험했습니다. 백인들의 무시와 차별을 받았습니다. 한편 여성은 남성으로부터 무시와 차별을 받았습니다. 그러면 흑인 여성은 인종적인 차별과 성적 차별을 받았다는 말이 됩니다. 그러나 허스턴의 이 작품에는 엄혹한 인종 차별은 잘 보이지 않습니다. 단지 흑인 남성이 흑인 여성을 차별하는 광경이 자주 보입니다. 흑인 남성들이 마을에 살지만 백인으로부터의 차별 이야기는 자주 보이지 않습니다. 세 번의 결혼을 통하여 주체적인 자아를 찾아가는 주인공의 여정을 보여주는 소설이니 어쩌면 당연하지만 원래 허스턴은 “민속 전통이 남아 있는 남부의 시골을 배경으로 하여 결핍 없고, 인간적인, 매우 낙천적인 흑인상을 주로 그려 보였기 때문”에 “특히 당대의 흑인 남성 비평가들은 허스턴의 작품이 사회 현실을 제대로 다루는 데 실패했으며 이를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백인의 구미에 영합한 결과로 보았다”라고 합니다. 허스턴이 가진 중대한 약점이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제 생각은 다릅니다. 모든 사회는 모순과 부조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도 모든 사람이 동의할 수 있는 모순과 부조리만 있는 것이 아니어서 모순과 부조리의 종류와 개수는 몇 배 더 많아집니다.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어떤 사람들이 모순이라고 부르는 것을 다른 사람들은 아니라고 주장하고, 다른 사람들이 부조리라고 하는 것을 어떤 사람들은 아니라고 한다는 말입니다. 노란봉투법이 근로자를 옥죄는 모순적 상황을 타개하는 수단이라는 주장과 불법행위를 조장하는 부조리한 법이라는 주장이 맞부딪히는 것을 예로 들면 이해가 조금 될 듯도 합니다만 이 두 주장만 있는 것도 아닌 절충된 모순과 부조리도 있을 터니 이쯤 되면 무엇이 옳은 것인지 종잡을 수가 없을 수도 있습니다. 이럴 경우에는 범위를 좁혀 이야기를 전개하면 해결책이 보일 수도 있습니다. 사람 사는 세상에서 모든 모순과 부조리를 해소하는 답이 정해진 것이 뭐 그리 많겠습니까? 잘게 쪼개서 보는 것도 방법일 것입니다.
작가 허스턴은 어쩌면 애초부터 거대 담론을 얘기하고 싶어 하지 않았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 당시 세대를 달리하여 억압된 삶을 경험한 흔하디 흔한 여성의 이야기가 그래서 만들어졌을 것이라는 추측을 했습니다. 할머니 내니의 삶은 엄마의 삶을 바꾸지 못합니다. 할머니가 경험한 차별과 억압을 피하기 위하여 할머니는 딸을 교육시키고 세상에서 보호하려고 하지만 실패합니다. 그런 할머니에게 보호받으며 자라던 엄마의 실패는 할머니에게 더욱 강한 확신을 주고 손녀 재니의 삶을 함부로 구획합니다. “자신의 존재에 대한 반성”이 없는 할머니는 “다른 삶의 가능성을 모색”할 수 없는데도 손녀 재니의 인생에 개입합니다. 3대에 걸친 모녀(모자, 부녀, 부자)의 이야기는 우리 모두 경험한 이야기입니다.
재니와 같이 지냈던 동네 주민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저의 어린 시절 가난했던 마을에서 살았던 동네 할아버지와 할머니들이 생각났습니다. 그리고 그들과 살면서 긴장관계를 형성했던 그들의 자식들 그리고 그들의 이웃들이 생각났습니다. 미국과 한국, 전혀 다른 땅에서 살았던 사람들이 왜 비슷하게 보이는지 그 이유를 한참 동안 생각했습니다. 가난을 극복할 수단이 없어 그저 떠들기라도 해야 했던 그들이 한심스럽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한계를 가진 경험과 지식으로 인하여 자기 존재에 대한 반성을 통한 다른 삶의 가능성을 모색하지 못한 사람들이었다는 생각에 이르렀습니다. 그렇다고 그들을 비난하던 저의 청춘은 이미 지났습니다. 그들을 얘기하는 수고로움은 접고 스스로에게 용기를 쟁여주기에 바쁩니다. 재니의 이야기는 옛날 할머니가 전해주던 이야기처럼 들렸습니다.
“인생 별 것 없다.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살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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