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제시초(2)
시는 도처에 있다는 말을 합니다. 시인이라서 그런가 보다 관념적으로만 생각했습니다. 그러다 이상국 시인의 시 한 편을 읽다가 그만 그것이 진리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아름다운 세상의 일상이라서 시라고 한 것일 수도 있고, 아름다움을 상실한 세상이 슬픔임을 알아서 한 말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일상의 소소한 생활, 무언가 부조리한 듯한 세상사가 시일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는 저도 시를 쓸 수 있을 것 같다는 착각에 빠졌습니다. 그런 생각이 들게 한 시를 소개합니다.
제목은 무제시초(無題詩抄)입니다. 짙은 글자체가 시입니다. 그렇지 않은 글자체는 제 감상이고요. 시를 감상하시는데 방해가 될지 모르지만 제 감흥이 절로 따라가니 글모양이 이렇게 되었습니다. 글이 길어 시를 나눴습니다. 이어집니다.
텅 빈 공양간에서 늙은 보살 혼자 저녁을 자신다.
해질 때는 부처도 가엽다.
산골살이 해질 때의 외로움을 경험했다고 일전에 말한 적이 있는데, 해질 때는 부처도 가엽다는 시어가 깊이 들어옵니다. 산골살이 해질 때는 외롭다는 글보다 훨씬 다른 말이 되었습니다. 부산스러웠던 공양준비도 끝나고, 아마도 설거지까지 마무리한 모양입니다. 도와주던 보살들도 떠나고, 늦은 저녁을 자시는 보살이 부처처럼 보이지만 늙은 보살의 숟가락 젓가락질에 외로움이 덕지덕지 붙어 가엽기만 합니다. 단지 해질 때라서 그렇다고 합니다. 하루도 가엽지 않은 날이 없는가 봅니다.
폐지 줍는 노파가 아무렇게나 빈 수레를 끌고 간다.
쓸데없이 나에게 골이 나 종일 건달처럼 보냈다.
폐지 줍는 노파, 짐이나 가득 찼으면 뒤라도 밀어줄걸. 비었습니다. 괜히 시인 자신에게 골을 냅니다. 이유 없이 시부렁대면서 시비 거는 놈은 동네 건달뿐입니다.
누구에게 나쁜 맘을 먹는 건 독약은 내가 먹고
남이 죽기를 바라는 것과 같다고 한다.
큰일이다.
누군가를 미워한 경험이 없다는 사람이 있다는 말이 사실이라면 저는 다섯 손가락에 장을 지지고 하늘을 날겠습니다. 그런데 누구를 미워하는 마음이 자기를 괴롭힐 뿐 정작 미운 당사자에게는 아무런 피해도 없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없다는 말에는 저는 앞의 장담을 할 수가 없습니다. 저주와 양밥(주술)이 왜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이게 효과가 별로 없으니 이번에는 위안을 합니다. ‘맞은 놈은 다리 뻗고 자지만, 때린 놈은 다리 뻗고 못 잔다’ 이 말이 사실이라고 얘기하는 사람이 있다면 몇 대 때려주고 싶습니다. 정말 그런지 해보라고요. 나쁜 맘을 먹게 하는 세상에 대하여 어쩔 수 없이 마시는 독약이 큰일이라고 저는 읽었습니다.
귀대하는 군인이 시외버스 맨 뒤 구석 자리를 달라고 한다.
자리가 많다고 해도 거기를 달라고 한다.
나도 한때 그런 자리가 좋았던 적이 있었다.
시인의 귀와 가슴은 늘 열려 있는 모양입니다. 저도 간혹 마음 가면 보는 일상이지만 누군가 귀띔하면 하면 바로 기억하는 풍경이지만 좀체 표현하지 못합니다. 귀대하는 군인의 심정이 읽힙니다. 표현하지 못한다고 없는 것은 아니지만 있다고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알았습니다.
누구네 딸이 고시에 붙었다고 동네에 현수막이 걸렸다.
살면서 제일 환하고 기쁜 일은 자식들이 잘돼서 부모 이름이 나는 일.
나도 아버지의 아들이었다.
아버지에 미안한 일 하나, 저도 아버지의 아들이었지만 현수막 한번 걸어드릴 자랑거리를 드리지 못했습니다. 마을에서 처음으로 4년제 대학을 간 아들이었습니다만 아버지 마음에만 현수막이 걸렸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아버지의 아들은 그랬지만, 제 딸은 현수막을 걸었습니다. 고향 마을 들어가는 입구와 통행이 잦은 곳 모두 4곳에 달렸습니다. 누구네 딸이 미인이라고 달렸습니다. 이건 아내의 몫이 컸습니다. 그러나 아내의 고향에서는 아무 연락이 없었습니다. 당연히 현수막도 없었고요.
공자를 화장실에 두고 읽는다.
소인배는 혼자 놔두면 나쁜 생각을 한단다.
시인의 마음을 읽지 못해 그냥 그러려니 하고 읽습니다. 이 시 읽고 있는 지금 저도 혼자 있습니다. 시인이 하는 나쁜 생각이 저에게도 전염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일상이 시가 된다는 시인들의 말은 거짓이 아닙니다. 화장실에 두고 혼자서 자꾸 읽고 싶은 좋은 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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