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산의 입적시
임진왜란의 파고를 어렵사리 넘어가게 된 은덕을 베푼 인물이 승병을 이끈 서산대사(휴정)라고 선생은 소개합니다. 서산은 하나의 승려로서, 하나의 사상가로서 매우 심오한 인물이었다고 합니다. 그가 입적할 때 쓴 시만 보아도 그 인격의 깊이를 알 수가 있습니다. 그가 입적할 때, 대중들에게 설법을 한 후 자기의 영정(초상화)을 가져오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그림걸개 뒷면에다 이렇게 썼습니다.
팔십년전거시아(八 十 年 前 渠 是 我)
팔십년후아시거(八 十 年 後 我 是 渠)
서산대사 최후의 찬란한 노을의 광채가 담긴, 이 서산의 생애의 모든 것이 압축되어 있는 시를 해석한다는 것이 여간 쉽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문의(文義)는 매우 간단합니다. 다른 한자는 모두 아시는 것일 텐데, 渠가 문제입니다. 이 글자는 당. 송대의 구어체에서 쓰던 말로써 현대 백화의 타(它, 他)에 해당하는 의미랍니다. 선생이 번역한 대사의 입적시입니다.
팔십 년 전에는 거시기가 난 줄 알았는데,
팔십 년을 지나고 보니 내가 거시기로구나!
선생의 해설입니다. 자기 자신의 화상을 놓고 하는 말이니 거시기는 객체화된 ‘자기 Ego”를 말하는 것이겠지요. 나의 모습이 나의 밖에 객체로서 걸려 있는 것입니다. 즉 자기 인식이 자기 “밖”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죽을 때가 되어 철들고 보니 여기 살아있는 내가 곧 거시기, 즉 거시기는 주체적인 나의 투영일 뿐, 영원히 살아있는 실상은 나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한번 이 “거시기”를 부처님으로 바꾸어놓고 생각해 보죠! 어렸을 때 불문에 들어와 구도자로서 행각을 시작할 때에는 부처님은 항상 저기 연화좌 위에 앉아있는 거시기(그 무엇)였습니다. 나 밖에 있는 초상화 같은 것이었죠. 이제 열반에 들려고 하는 마지막 순간에 생각해 보니, 이 죽어가는 내가 곧 부처요, 80년을 살아온 이 나가 곧 싯달타였다(八 十 年 後 我 是 渠) 라는 것이죠.
거시기를 “예수”로 바꾸어 놓고 보아도 똑같습니다. 보통사람들에게는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의 상이 신앙의 대상으로서 거시기화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의 궁극에 도달한 자는 깨달을 것입니다. 예수가 나의 숭배의 대상이 아니라, 내가 곧 예수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죠. 내가 곧 십자가를 멘 예수가 될 때에만이 그리스도의 의미가 완성되는 것입니다. (이상 41~43쪽)
예수님을 본받아 살아갈 수 있도록 은혜 베풀어달라고 간절히 기도하는 저의 모습은 언제쯤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저 모습이 나였구나 하는 은혜를 얻을 수 있을까요? 지독히 어려운 문제입니다. 선생의 해설이 불경스럽지 않았습니다. 신앙은 신을 믿는 것이 아니라 신을 닮아가는 것이 궁극의 목적이 아닐까요? 그것이 현실에서 가능한 것이든 그렇지 않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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