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살혁명: 대승불교
중요한 것은 스투파가 만들어지면서 전통문화와 관련되어 지속되어 내려온 “탑돌이”입니다. 이 탑돌이문화는 폭발적 인기를 끌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이전에는 싯달타라는 대각자가 있었다는 소문은 들었어도, 그의 열반 후에는 그의 설법은 들을 수도 없었고, 그의 집단의 행사에 참여할 수 있는 루트가 전혀 개방되어 있지 않았는데, 부처님의 스투파가 생겼고 그곳에서 소원성취를 빌면 정말 효험이 있었으니 스투파는 승가집단 “외에” 생겨난 부처님의 향내가 나는 개방적 공간이었습니다. 이 “개방적”이라는 말이 중요합니다. 이것이 “대승”이라고 하는 말의 실제적 의미의 전부라고 봐도 됩니다. 탑돌이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계율도 없고 간섭자도 없고 지도자도 없습니다. 진짜 “대중”이지요.
그런데 이 대중에게 한 가지 공통된 관심사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싯달타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이었습니다. 이 대중들에게 석가모니에 관하여 유창한 구라를 늘어놓은 설화인들이 생깁니다. 그들은 공부를 많이 하여 싯달타의 생애와 교설에 관해 심오한 언설을 늘어놓게 되고 이렇게 구라를 풀다 보면, 자기 구라 속의 모델 인물인 그 주인공의 모습으로 자기가 변해가는 것은 너무도 자연스러운 이치가 아니겠습니까?
누구든지 석가모니를 생각하고 석가모니를 본받고 석가모니의 말씀을 실천하기만 하면 석가모니가 될 수 있다, 그러한 각성, 자각이 든 사람을 “보리살타” 즉 “보살”이라고 부르기 시작한 것입니다. 보살은 “보리를 구현한 존재”, “보리를 향한 존재”, “보리의 실현이 그 본질인 사람”, “보리가 체화된 사람”이라는 뜻이지, 비구보다 더 낮은 단계의 사람도 아니고, 스님을 섬겨야만 하는 공양주보살도 아닙니다. 이러한 인식의 변화는 불교라는 전체체제에 엄청난 변화를 주게 되었습니다. 비구(빌어먹는다는 뜻입니다) 중심의 승방정사에서 탑중심의 거대한 가람으로 불교중심이 이동하게 되는 것이죠.
대승불교가 초기불교와 다른 점을 정리합니다.
첫째, 싯달타의 종교가 아니라 보살의 종교입니다. 둘째, 재가자와 출가자의 구분이 없습니다(삼보일체). 셋째, 난행도(어렵게 달성되는 길: 공부, 이지적 깨우침)와 이행도(쉽게 달성되는 길: 염불, 신앙)를 포섭합니다. 넷째, 대승불교는 보살 일승의 종교입니다. 불타는 이미 색신의 싯달타가 아닙니다. 색신의 불타는 사라지고 법신으로서의 불타가 신앙의 중심에 자리 잡게 됩니다. 이것은 실로 모든 이론의 도약을 가져오게 되지요. 다섯째, 대승불교의 가장 큰 특색은 모든 인간이 보살이라는 신념에 있습니다. “반야사상은 대승불교의 출발이다”라는 말은 누누이 반복되었습니다. 반야사상은 대승불교에서 새롭게 정의된 사상이라는 뜻입니다.
대승은 결국 “무아(無我)라는 이 한 가르침으로 회귀하는 것입니다. 불교는 무한한 혁명을 수용합니다. 불교가 무한한 혁명을 수용할 수 있는 것은 그 최초의 원초적 핵심에 불교가 이래야만 한다는 “아상”이 없기 때문입니다. 계율을 지킨다는 것은 항상 아상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지혜의 완성이라고 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아상을 죽이는 수행입니다. 이것은 또 하나의 계율이기는 하지만 타율적 수율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자기 수련입니다.
이제 처음으로 돌아가 반야바라밀다심경을 다시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느끼는 점이 다를 것이라고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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