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학자 전우용, 그를 안 것은 그가 출연하는 방송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사회자가 묻는 어떤 말에도 거침없이 기원과 출처를 알려주고, 역사적 의미를 설명하면서 정확한 용례와 잘못된 용례를 드는 해박함에 놀라서 그가 쓴 책을 읽으면 나도 상식이 늘 수 있지 않을까 욕심을 부려 고른 책입니다. 개가 달을 보고 짓는다는 말인데, 달이야 원래 항상 언제나 그 시각에 그 자리에서 뜨고 지는 것인데 개가 달을 보고 짓는 것은 어떤 연유일지 궁금했습니다. 그 궁금증을 하나씩 같이 해결하는 의미로 정리할 생각입니다.
공시인순막(貢市人詢瘼)
왕이 직접 저자에 나가 상인들의 고충을 듣는 공시인순막이 관례화한 것은 서울이 상업 도시로 변모하던 18세기 중반부터입니다. ‘순막’이란 ‘병폐에 관해 묻는다’는 뜻입니다. 영조 45년 2월 다음과 같이 하교합니다. “시전 상인들에게 물어보았더니 왕족과 세도가에서 외상을 지고 갚지 않는 것이 수천 냥이라고 하는데, 일의 한심스러움이 이보다 심할 수 없다. 나의 백성들이 어떻게 감당하겠는가? 외상을 많이 지고 갚지 않는 자들은 모두 잡아다 처리하고, 시전을 관리하는 당상은 파직하여 앞으로 임용하지 말며, 담당 관리는 잡아다 심문하도록 하라”
순조 27년 3월의 명은 이렇습니다. 홍기섭이 말하기를 “공시인들이 폐막에 대해 말하면서 임금의 은혜를 구하는 것이 너무 많으니, 그 버릇이 해괴합니다. 이러한 경우에는 마땅히 징벌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명하기를 “그냥 두라” 하였답니다.
공시인순막은 영조 대 이후 관례가 되었습니다. 최고 통치자가 ‘삶의 현장’에서 나오는 목소리를 듣는 건, 유서 깊은 한국 정치 문화라 할 수 있습니다. 대통령이 국민에게 묻는 것은 근원이 있는 전통일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것을 쇼라고 부른다고 해도 쇼인가 아닌가 가 중요한 게 아니라 쇼의 리얼리티와 수준이 중요할 것입니다. 대통령은 ‘철저한 공인’으로서, 삶의 거의 모든 부면이 ‘공개’ 되는 사람입니다. 시민들이 그의 생각과 말과 행위 전체를 볼 수 있어야 하는 존재입니다. 국민에게 묻는 모습에서 그의 생각과 말과 행위가 리얼리티가 있고 감동적이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공시인순막 행사는 조선말까지 계속되다가 갑오개혁 이후 폐지되었습니다. 조선 총독도 시장에서 상인들과 만나는 일은 하지 않았습니다. 공시인순막을 되살린 건 ‘임금’이라고 생각했던 이승만입니다. 이승만을 대하는 상인들의 태도도 ‘왕조 국가의 신민’과 거의 다르지 않았고요. 선생은 정치인들이 시장 골목에서 어묵, 떡볶이, 라면 등을 사 먹으며 상인들에게 ‘경제가 어려워 큰일이다’ 등의 얘기를 하는 건 사실 ‘서민 코스프레’가 아니라 ‘임금 코스프레’라고 주장합니다(지금까지 설명을 따라오셨다면 수긍이 되시지요). 이 이벤트의 ‘정치적 효과와 상징성’도 ‘왕조 국가의 신민 의식’과 무관하지 않으리라고 봅니다.
선생의 설명은 이어집니다. 지금은 서울시민의 절반이 시장 상인도 아니고, 앞으로도 아주 특별한 맛집이 아닌 한 어묵이나 라면 가게 주인의 입에서 “장사 잘 된다”나 “먹고살 만하다”는 말이 나올 일은 없을 겁니다(2019년 12월 작성한 글인데 이런 상황이었다면, 2020년 3월 팬데믹을 선언한 후 더욱 어려워졌겠지요. 2023년 7월 현재라고 달라진 건 없을 듯합니다. 금리는 올랐고, 물가도 올랐으니까요). 최저임금 받는 노동자들을 찾아가서 “최저임금이 올라 살기 어렵지 않으냐?”고 묻는 게 차라리 현실감 있는 정치인의 태도일 겁니다. 이 방법은 시대착오적이고 중세적인 ‘대권 욕심 정치인의 골목시장 순막’입니다.
선생의 공시인순막에 관한 두 토막의 이야기를 연결했습니다. 정치인들이 대권을 노린답시고 재래시장을 방문해서 시대착오적이고 중세적이며, 김치국물부터 마시는 임금 코스프레는 하지 않으면 좋겠다는 것과 대통령이 된 후 한쪽 구석에서 술이나 퍼 마시거나 구중궁궐에 숨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르게 신비주의 마케팅을 하지 말고, 일 년에 한두 번은 국민들에게 직접 물어보면서 대통령의 말과 생각과 행동을 공개적으로 보여줘 국민들이 그를 신뢰할 수 있도록 하라는 것이 선생의 충고로 보입니다.
국민들과 만나면 질문하는 것이 두서도 없고, 일용직 노동자, 소상인, 고등학생 등의 ‘사심’을 담은 질문이 귀찮아서 만나시기 그렇다고요? 쇼 같다고요? ‘삶의 목소리’는 본래 오늘은 이랬다가 내일은 저랬다가 하는 것이어서, 일관되기도 정제되기도 어렵다는 것이 선생의 통찰입니다. 쑥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들으시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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