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이나 개인이 할 수 없는 일. 라임이 구한 목숨들.
영국은 16세기부터 스페인, 네덜란드, 그 후에는 프랑스와 차례로 유럽의 바다, 그리고 종국에 가서는 세계의 바다에 대한 패권을 두고 경쟁을 벌였습니다. 1805년 트라팔가 해전에서 허레이쇼 넬슨 제독의 지휘 아래 프랑스와 스페인 연합 해군을 무찌르고 패권을 차지한 영국 해군은 이후 1세기 동안 전 세계 바다를 호령했습니다. 해군은 적의 침입을 막고, 제국을 확장하고, 식민지와의 교역을 보호해서 누구도 넘볼 수 없는 강국을 만들었습니다. 이런 해군의 유지에 혁혁한 공을 세운 과일이 있으니 라임이라고 합니다.
15세기말부터 선원들의 목숨을 가장 많이 앗아간 적은 적군도 해적도 폭풍우도 아니었습니다. 몸에 비타민 C가 부족하면 걸리는 괴혈병 때문이었습니다. 괴혈병은 무기력증과 함께 잇몸이 부어오르고 피가 나면서 치아가 흔들리다가 빠지고, 극심한 관절 통증을 앓다가 사망에까지 이르는 끔찍한 질병입니다. 당연히 다들 미친 듯이 괴혈병 치료제를 찾아 헤맸고, 서서히 시트러스(귤 속) 과일의 과즙이 효과적인 치료제라는 사실이 알려지기 시작했지만, 20세기 전까지는 괴혈병에 효과를 발휘하는 주인공이 비타민 C라는 것을 사람들은 알지 못했다고 합니다.
괴혈병을 예방하는 데 시트러스 과즙이 효과적이라는 사실은 경쟁국들의 해군도 알고 있었지만 이 해결책을 체계적으로 이용한 것은 영국 해군이 처음이었습니다. 1795년 영국 해군 사령부는 레몬주스가 선원들의 배급품 목록에 필수적으로 포함되도록 했고 물로 희석한 럼주에 레몬주스를 섞은 ‘그로그’라고 부르는 음료를 배급해서 선원들이 레몬주스를 섭취할 수 있도록 하는 영리한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얼마 가지 않아 레몬 대신 라임이 사용되기 시작했습니다. 라임이 값이 더 저렴했고, 레몬과는 달리 영국이 식민지화한 카리브해 연안에서 자라는 과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또 다른 이유는 라임이 레몬보다 더 효과적일 것이라는 잘못된 믿음, 즉 괴혈병을 치료하는 것이 비타민 C가 아니라 신맛이라는 오해에서 비롯된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라임이 레몬보다 산도는 높지만 비타민 C 함량은 절반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기후 변화에 대응하는 기술을 설명하기 위해서 저자는 라임을 가지고 왔습니다. 전 지구적인 문제인 기후 변화에 대응하지 못하면 지구라는 배에 탄 선원들은 살아남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자는 기술 개발의 경우 정부가 적극 개입해서 그린 테크놀로지(녹색 기술)를 장려하는 정책을 시행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냥 시장에 맡겨 두면 기후 변화와 싸우고 대처하는 데 필요한 수많은 기술이 개발되지 않고 말 것이라며, 그 이유는 민간 기업들이 사악해서가 아니라 단기적 성과를 내야 한다는 끊임없는 압박에 시달리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민간 부문이 이렇게 근시안적으로 경영하는 경향이 심하기 때문에 신기술 개발을 위한 대규모 투자나 그렇게 개발된 신기술을 채용하는 과정에서 전통적으로 항상 정부가 강력한 역할을 수행해야만 한다는 것이죠.
라임이 괴혈병 치료와 예방에 효과적이란 사실은 비밀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조직 중 하나였던 영국 해군이 단호한 결정을 내려 이 방법을 효과적으로 실천하겠다는 의지를 발휘하지 않았다면 선원들의 생명을 구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기후 변화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모두 해결책을 알고는 있지만 영국 해군과 라임 사례에서 보았듯이 그 해결책의 실천 과정을 시장에서 각 개인이 내리는 선택에 맡겨 둘 수는 없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입니다.
그런 한편 개인행동의 변화가 단호한 대규모 공적 조치와 함께 이루어질 때 사회 변화는 가장 효과적으로 발현된다며 저자는 우리 개인들에게도 소정의 책임을 부담하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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