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에세이

세월. (ANNIE ERNAUX) 아니 에르노 지음. 신유진 옮김. 1984BOOKS 간행

무주이장 2023. 6. 25. 12:34

 나이가 들어 지나간 세월을 회상하는 방법은 사람마다 다를 것입니다. 대포를 잘 쏘는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우렁찬 울음으로 주위를 놀라게 했다며 허풍이 가득한 이야기로 시작할 것입니다. 남들에게 자신의 부끄러운 모습을 보이기 싫은 사람은 군데군데 뭉텅 빠뜨린 이야기를 할 수도 있습니다. 세상을 자기중심으로 각색해서 이야기를 하기가 쉽습니다. 작가는 그런 이야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이 세계가 그녀 안에 새긴 것들과 그녀와 동시대를 사는 이들. 아주 오래전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슬며시 미끄러져 온 시간을 공동의 시간을 재구성하는 데 사용할 것이다- 공동의 기억에 대한 기억을 개인의 기억 속에서 되찾으며, 역사를 경험한 측면에서 표현하기 위해. 하나의 삶을 이야기하거나 자신을 설명하는 것을 추구하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회고 작업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319~320)

 

  공동의 시간을 재구성하려면 관계를 맺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같이 풀어내야 할 것입니다. 관계를 맺어야 공동의 기억이 생기겠지요. 개인의 기억 속에서 공동의 기억을 반추하면 우리들이 살았던 역사가 보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각자의 삶을 회고하는 작업은 역사를 회고하는 작업이 되고 관계했던 사람들을 기억하고 공동의 기억을 회고하는 작업입니다. 이 작업에서는 우렁찬 출생의 울음을 내지른 유치한 영웅도 없고, 숨겨야 하는 부끄러움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살았던 삶이란, 세월 속에서 우리가 살아냈던 삶이고, 어느 것 하나 공동의 기억 속에서 의미 없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우리의 의지가 개입을 했던 그렇지 못했던 그것은 조건이 아닙니다. 못해서 아쉬운 일, 잘한 일, 너무 진지해서 비극적인 일, 너무 가볍지만 행복했던 일 모든 것이 다 의미를 갖습니다.

 

  저자의 글은 시종일관 조용히 읊조리는 듯하여 귀를 쫑긋 기울여야 들을 수 있습니다. 프랑스의 안팎에서 있었던 사건 사고를 모르는 상황에서는 더욱 이야기에 집중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럼에도 이야기를 듣기에 어려움이 없었던 이유는 그의 이야기가 그에게만 한정된 이야기가 아니라 그와 같은 세월을 산 사람들의 이야기와 겹치기에 그렇습니다. 겹쳐진 사람들이 직접 어떤 이야기를 하지 않더라도 그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공동의 기억 속에는 반드시 같은 기억만이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양한 기억들의 존재를 확인합니다. 그래서 이야기가 지루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이야기가 지루하지 않았던 또 다른 이유는 그의 이야기가 20년 이상 뒤늦게 따라 살았던 나에게도 익숙하고 동시대를 산 듯한  착각(사실 우리는 중첩된 세월을 산 경험이 있지요)을 하게 했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최근 유럽 여행을 다녀온 동료 직원이 프랑스를 모델로 한국에 적용한 사례들이 많다는 가이드의 설명을 전했습니다. 기왕 그랬다면 이기적인 인간을 전제로 자기의 이익을 위해 타인의 생명과 재산을 경시하는 그런 철학이 아니라 저자가 설명하는 사회적 유럽’ ‘공동의 기억을 강조하는 철학이 널리 퍼지길 기대합니다.

예스24에서 가져온 이미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