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이방인인 너희에게 말하노라 내가 이방인의 사도인 만큼 내 직분을 영광스럽게 여기노니 이는 혹 내 골육을 아무쪼록 시기하게 하여 그들 중에서 얼마를 구원하려 함이라 그들을 버리는 것이 세상의 화목이 되거든 그 받아들이는 것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것이 아니면 무엇이리요 제사하는 처음 익은 곡식 가루가 거룩한즉 떡덩이도 그러하고 뿌리가 거룩한즉 가지도 그러하니라
문장이 조금 어렵습니다.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라 자칭합니다. 그렇지만 그가 이방인의 사도가 된 것은 이방인을 구원하겠다는 것이 궁극적인 목적이 아닙니다. 매일성경에서는 하나님이 바울을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신 궁극적인 목적은 유대인의 구원이라고 설명합니다. 바울이 애써 이방인이 구원을 받게 되면 유대인들이 구원받은 이방인들을 시기, 질투하여 예수님에게로 와서 구원을 받을 것을 기대했기 때문이랍니다. 유대인들이 넘어져 빈 공간이 생긴 것이 이방인들이 하나님 나라로 풍성하게 들어왔다며, 매일성경은 이방인도 구원을 받았다면, 유대인마저 회개하고 돌아오는 것이 얼마나 충만한 일이 되겠느냐고 설명합니다. 유대인의 구원은 죽었다 부활한 것 같은 새 창조 사건이 될 것이라고 매일성경은 설명합니다. 바울은 첫 열매의 곡식 가루(믿는 유대인)가 거룩하니 나머지 열매로 만든 떡덩이(믿지 않는 유대인)도 거룩해질 것이고, 뿌리(언약의 족장)가 거룩하니 가지(믿지 않는 유대인)도 언젠가는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이 될 것이라고 합니다. 위 성경말씀을 묵상하면서 의문이 생깁니다.
바울의 사도로서의 궁극적 임무는 이방인의 구원이 아니라는 겁니다. 이방인이 구원을 받게 한 것은 영광스럽긴 하지만 그 일을 한 궁극적인 목표는 이방인이 아닌 유대인의 구원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을 이방인의 사도라고 부르면 어색하게 됩니다. 유대인이자 바리새인인 바울은 유대인의 구원을 위한 방편으로서 이방인을 구원한 것이니 이방인의 구원을 수단으로 여긴 것입니다. 구약의 존재는 하나님의 존재를 확인하고, 이미 그때부터 구세주 예수의 출현을 예지 하였다는 것을 증거 하기 위한 것이란 교리를 배운 기억이 납니다. 구약속에 예수가 벌써 약속되어 있었다는 말이지요.
구약의 주인공은 유대인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구원을 약속받은 민족입니다. 예수는 혈육으로는 다윗의 자손이라는 표현도 볼 수 있습니다. 구약속에서는 유대인들이 예수를 믿던 믿지 않던 하나님의 약속은 언제나 존재하고 실현될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를 단지 선지자로 이해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입니다. 이방인의 사도, 이방인의 신약으로 자기 역할을 충분히 할 수 있고 그것이 목적이었으면 이방인들이 섭섭하지 않았을 듯합니다. 서울 거리에 휘날리는 이스라엘 국기도 유대인을 꿈에도 그리는 모습으로 보여 꼴불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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