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태훈(중근의 아버지)이 천주교로 개종한 이후 안중근과 그 일가는 천주교도로 살았고, 천주교도로 죽었다. 그러나 안중근의 순국 당시 한국 천주교는 그의 교도 자격을 부인했다. 안중근에게 종부성사를 베푼 빌렘은 한국 천주교로부터 배척당해 귀국할 수밖에 없었다. 식민지 시기 내내 천주교계는 안중근을 ‘흠’으로 인식했을 뿐 결코 ‘자랑’으로 여기지 않았다. 해방은 안중근과 천주교계의 관계를 역전시켰다. 안중근을 파문한 것이 천주교의 주요한 흠이 되었다. 천주교를 빼고 안중근을 논할 수 없었기에 안중근을 빼고 천주교를 논할 수도 없었다.
1947년 3월 26일, 안중근 유족들의 요청으로 명동성당에서 37주기 추모 연미사가 거행되었다. 이기준 신부가 집전한 이 연미사에는 노기남 주교가 참석했다. 명시적 표현은 없었지만 안중근을 천주교도로 복권한 의례였다. 이후 천주교는 거의 매년 안중근 추모 미사를 거행했으며, 때로는 대주교가 직접 참석했다.
1962년 10월 11일, 제2차 바티칸공의회가 소집되었다. 공의회는 전 세계 가톨릭 교구 지도자와 신학자들이 모여 교회의 신조와 원칙에 관한 문제들을 토론하고 정의하는 회의를 말한다. 제2차 공의회의 주요 안건 중 하나는 전쟁에 대한 천주교인의 태도 문제였다. 전쟁은 본디 반인도적이고 반종교적인 행위다. 이교도에 대한 전쟁은 종교의 이름으로 정당화할 수 있었지만, 종교가 같은 사람들끼리 벌이는 전쟁에 대해서는 그럴 수 없었다. 천주교도에게 총을 쏜 천주교도를 어떻게 대해야 할까? 정규군이 아닌 레지스탕스의 일원으로서 또는 단독으로 나치당원을 죽인 천주교도는 또 어떻게 대해야 할까? 천주교도로서 유대인 대학살에 가담한 사람은 어떻게 처리하는 것이 옳은가? 전쟁은 세속적인 일이라고 외면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그것은 인간 실존에 관한 가장 종교적인 문제였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아우구스투스의 ‘정의의 전쟁론’과 유사한 ‘사목헌장’을 채택했다. 사목헌장은 첫째, 적국이 분명하고 극단적으로 중대한 불의를 먼저 자행했으며, 둘째, 모든 평화적. 비폭력적 해결 방안들이 소진되었고, 셋째, 무력 저항에서 발생하는 해악이 적국이 자행한 불의보다 크지 않다면, 정부는 최후의 수단으로써 전쟁을 선포하고 수행하는 것이 정의에 부합한다고 결론 내렸다. 제2차 공의회가 종료된 지 2년 후인 1967년 3월 26일, 교황 바오르 6세는 ‘민족들의 발전 촉진에 관한 회칙’을 공표했다. 여기에서 그는 “인간의 기본권을 유린하고 국가의 공동선을 극도로 해치는, 폭군적 압제가 오래 지속될 경우”에는 혁명적 반란이나 무력 저항이 가능하다고 밝혔다. 제국주의 시대 민족해방투쟁을 종교적으로 정당화하는 선언이었다. 이제 천주교계가 안중근의 의거를 종교적으로 정당화할 수 있는 원칙이 마련된 셈이다.
이로부터 10년 뒤인 1979년 9월 2일, 명동성당에서 대주교 노기남의 집전으로 ‘안중근 탄생 100주년 기념 미사’가 열렸다. 추념미사는 일상적 종교의례지만, 탄생 기념 미사는 특별한 행사였다. 이 무렵부터 천주교계는 안중근을 한국 천주교 역사 안에 적극적으로 끌어들이기 시작했다(2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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