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에세이

중국정치사상사, 김영민 저, 사회평론아카데미 간행 8.

무주이장 2023. 2. 27. 11:56

3세기~10세기의 관습적인 중국사  : 당나라의 정치질서

 

관습적인 중국사 서술에 따르면 위진남북조시대(220~589), (581~618), (618~907), 5대10국시대(907~960)가 한나라 멸망에서 송(960~1279)의 창건 사이에 펼쳐져 있다. 3세기부터 10세기에 이르는 이 시기는 정치적으로 많은 정치체가 공존하고 또 빠르게 명멸했기 때문에 내전과 정치적 혼란으로 점철된 시기라고 여겨져 왔다. 사회적으로는 귀족 사회였으며, 종교적으로는 대승불교와 도교가 번창했다.  문화적으로는 시가 문학의 가장 찬란한 형식으로 떠올랐고, 학문적으로는 협의의 철학이 쇠퇴했다.”(306)

 

이 시기의 정치사상을 공부하는 이들이라면 고민해야 할 질문들이 있다. 이 시기의 특징들을 어떻게 연결한 것인가? 당시 지식인들은 어떤 정치질서를 상상하고, 어떤 담론 실천을 통해 정치질서를 구성해나갔는가? 그 과정에서 종교와 문화는 어떤 역할을 수행했는가?”(306~307)

 

“3세기에 흉노 제국이 와해된 이후 많은 비한족계 사람들이 중원으로 이주하면서 정주민과 유목민의 정치적 구분은 점점 더 흐릿해졌다. 이 시기 또 하나의 시대적 특징으로는 강력한 힘을 지닌 가문의 등장을 꼽을 수 있다. 한때 중앙 정치에서 소외되었던 권력 가문들은 당나라 시대에 자신들의 문화적 정체성을 유지한 채 조정의 핵심 정치 행위자로 재등장하게 된다. 당나라 통치자들은 튀르크족(돌궐족) 같은 비한족계 사람들을 배제하지 않으면서 하위 계층과 귀족 엘리트를 통섭할 수 있는 포괄적인 시스템을 고안해야만 했다. 그러한 작업에는 많은 사상적.제도적인 변화가 필요했다. 누가 이 복잡한 당나라 정치 세계의 유대를 가능케 하고 통일성을 부여할 수 있는가? 이론상 그것은 황제였다. 당나라 황제는 한족의 천자인 동시에 유목민의 영수(텡그리 카간이라는 명칭을 사용했다=흉노족의 리더라는 뜻)였으니 그 이전 황제들보다 더 큰 역할을 하게 된 셈이다”(307~311)

 

당나라는 종교에 관용적이었다. 당나라의 수도 장안(지금의 시안)에는 불교와 도교뿐 아니라 동방정교회, 마니교,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 사원들이 있었다. 귀족이 아닌 사람들이 당나라 관료제의 중추에 접근하기는 어려웠지만 오늘날 보기에 별나다고 느낄 정도로 외국인들에게 열려 있었다. 간단히 말해 국가 관료제 역시 문화적으로나 민족적으로나 혼합된 세계의 일부였던 것이다. 당나라 황제는 수도 이외의 지역에까지 행정적 통제를 확대하기 위해서는 조정의 권세 있는 가문들의 개인 네트워크가 필요했고, 귀족들은 사회적 지위가 추락하지 않고 귀족 계층 안에서 자신의 입지를 확고히 해나가기 위해서는 국가의 도움이 필요했다.”(313~320)

예스24에서 가져온 이미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