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에세이

중국정치사상사, 김영민 저, 사회평론아카데미 간행 10.

무주이장 2023. 2. 27. 15:03

형이상학 공화국 : 북송

“도학은 지난 1,000년 동안 중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정치사상 사조였다. 여전히 많은 사람이 도학을 전제국가를 위한 이데올로기, 그리고 정체된 사회와 지배 계급의 자기 이익을 위한 이데올로기로 간주한다. 이러한 지배적인 견해에 반대하여 도학이 황제의 권위를 일견 받아들였음에도 불구하고 특별한 종류의 공화적 비전으로 이해될 수 있음을 주장하고자 한다.”(355쪽)

“907년 절도사였던 주전충이 당나라의 마지막 소년 황제를 죽임으로써 당 왕조는 공식적으로 막을 내렸다. 이후 등장한 정치체제들이 맞이한 지정학적 조건은 당나라 때의 그것과 매우 달랐다. 당나라가 해체되면서 당의 영토는 5대10국으로 갈라졌다. 960년에 이르러 송이라는 통일 왕조가 성립했지만 송의 영토는 그 이전 통일 왕조들에 비해 훨씬 작았다. 요, 서하, 남조, 금나라 같은 압도적인 군사력을 가진 정치체들에 둘러싸여 있었다. 게다가 1126년에는 금나라가 송나라를 침입하였다. 그다음 해에는 송나라 조정이 수도인 개봉을 포기하고 회하 남쪽으로 도망가야만 했다. 이처럼 적대적인 관계 속에서 중국이 중앙아시아의 영향에 전보다 훨씬 덜 개방적이 된 것은 이해할 만한 일이다.“(357~361쪽)

“북송의 성립을 기점으로 중세 귀족은 과거 시험을 통해 입신하는 새로운 유형의 엘리트로 교체되었다. 송나라 황제 주변에는 권위를 족보에서 끌고 오는 당나라 귀족 같은 잠재적 경쟁자가 없었다. 그래서 과거 시험을 통해 자신에게 충성하는 엘리트들을 끌어모을 수 있었을 것이다. 송나라 황제들이 과거 시험으로 관리를 많이 선발함에 따라, 송나라 관료제는 당나라 관료제에 비해 규모가 커졌다. 이러한 관료제 확대를 추진한 대표적인 정책이 왕안석의 신법이었다. 신법에 따르면, 국가는 지방의 경제에 개입하여 세금 수입 증대에 앞장서야 한다. 왕안석은 중앙정부가 직접 임명한 관리들이 지방사회를 장악할 수 있도록 관료제를 개혁하고자 하였다. 왕안석은 개인의 도덕성보다는 중앙정부의 조직적 역량을 이상적 정치질서의 궁극적 열쇠로 간주했다. 그는 도덕성에 대한 철학적 담론보다는 지방 관리의 급료 현실화나 관료 수의 증대 같은 제도적 문제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362~370쪽)

“신법과 왕안석의 정치사상이 북송대를 풍미한 것은 사실이지만, 북송대에는 왕안석 외에도 왕안석과 경쟁할 만한 대안적인 비전을 제시한 중요 사상가가 최소한 세 명 더 있었다. 정이, 소식, 사마광이 그들이다. 소식은 왕안석의 신법에 대한 중요한 정치적 반대자로 “신법은 작게 쓰면 작게 실패하고, 크게 쓰면 크게 실패한다. 쓰면 쓸수록 혼란과 멸망에 이르게 된다”라고 말할 정도로 극단적인 비판을 서슴지 않았다. 저자는 소식의 ‘적벽부’를 자신의 정치사상을 구현한 텍스트로서 해석하고자” 하였다. 저자는 “적벽부의 핵심은 변화 혹은 불변의 문제라기보다는 주체와 사물의 관계를 설정하는 관점의 문제이자 그러한 관점을 가능케 하는 주체의 문제이다”라고 주장한다. 결론적으로 저자는 “소식이 구상하는 이상적인 정치질서는 이른바 정치경제가 작동하는 영역에서는 각자의 주인됨을 보장하며(즉, 국가의 역할을 제한하고, 지방사회의 자율성을 상당 부분 보장하며), 동시에 삶을 구성하는 영역에는 그러한 정치경제의 영역의 원리가 작동하지 않는 영역이 있음을 인정하는(즉, 국가 주도의 현실 정치 논리에 포섭되지 않는 삶의 영역이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라면서 “요컨대 ‘적벽부’는 삶의 다차원성과 국가의 비개입을 전제하는 정치질서를 천명하고 있다고 하겠다. 그리고 그러한 정치질서를 살아낼 주체는 관점의 이동을 통해 삶의 다차원성에 조응해나간다고 할 수 있다.”라고 설명한다.”(371~388쪽)


소식의 적벽부 해설은 책을 통해 읽기를 권한다. 적벽부의 문학적인 해설은 익히 보셨겠지만 그의 정치사상으로 해석한 내용은 지적 호기심을 자극할 것이다. 

예스24에서 가져온 이미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