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우상 파괴, 주역은 종교 개혁으로 인한 개신교의 파괴활동
성상이 우상일 수 있다는 문제의식이 레오 3세 이후로도 완전히 끝난 게 아니었습니다. 나중에 이 논쟁은 다시 점화됩니다. 바로 우리가 아는 16세기의 종교개혁운동 때문입니다. 종교개혁운동 때도 개신교도에 의한 성상 파괴가 있었거든요.
종교개혁운동이 유럽을 휩쓴 이후 기독교 미술은 예전과 같은 영광을 다시 찾지 못합니다. 성상을 옹호하는 측에서도, 성상을 반대하는 측의 이교적이라는 비난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던 거지요. 16세기 이후의 기독교 미술은 점점 개성이 사라지고 도식적으로 변해갑니다. 그 결과 현대로 올수록 기독교 미술은 성경의 도해 같아졌습니다. 이전까지 기독교 미술만의 자율적인 세계가 있었다면 이제는 성경 내용을 설명하는 삽화처럼 변한 거예요. 드디어 엄격한 의미의 종교미술이 된 것입니다.
그렇다고 이슬람교와 개신교는 우상을 파괴하자는 주의이고 가톨릭은 성상을 긍정하는 것이라고 단순히 정리할 수는 없습니다. 가톨릭 안에도 다양한 의견이 있고 이슬람교나 개신교도 마찬가지라고 합니다. 성상을 둘러싼 견해는 모든 종교 내부에서 여전히 긴장감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떤 입장이신가요? 사람들과의 소통을 위해서 대중적인 이미지가 필요하다는 현실적인 성상 옹호론자인가요 반대로 성경의 근본주의적인 입장을 옹호하여 우상을 파괴해야 한다는 쪽인가요?
양 교수는 위의 질문에 대하여 관심 없다는 사람들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질문을 또 합니다. “혹시 영화에 15세 관람가, 18세 관람가 같은 관람 등급을 매기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요?” 그냥 만드는 사람에게 전적으로 맡길까요? 아니면 전문가 등 다수의 합의로 관리되어야 한다는 생각에 동의하실래요? 기독교 미술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예수의 모습을 본 적이 없으므로 어떤 성상도 진짜 예수라고 딱 잘라 말할 수 없습니다. 만드는 사람이나 보는 사람이나 그 점을 언제나 냉정하게 인지해야 하는데 그게 잘 안 됩니다. 창작 또는 감상하는 과정에서 주관적인 감정이 개입하기 때문에 이미지를 이미지가 가리키는 대상과 동일시하곤 합니다.
이미지는 이미지일 뿐, 옛날이라면 모를까 지금은 혼동하는 경우가 없지 않을까라는 반문에 양 교수는 답합니다. “아닙니다. 이런 일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비일비재한 일입니다. 불상이 땀을 흘리면 큰일이 벌어진다. 성모상이 피눈물을 흘리는 기적이 일어났다 등등… 아무리 사람들에게 성모상을 만진다고 병이 치유되는 게 아니라고 얘기해도, 목사나 신부가 신이 아니라고 해도, 사람들이 그렇게 믿고 싶어 하는데 어쩌겠어요? 이렇듯 이미지가 알게 모르게 신의 역할을 대신하게 됩니다. 결국 사람들은 스스로 우상의 포로가 되기도 합니다.”
우상이라고요? 이야기는 다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소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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