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상 파괴 논쟁
725년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 레오 3세는 당시로서는 가장 급진적인 개혁운동을 선포합니다. 신의 형상을 재현하는 것은 우상을 만드는 것이며, 우상 숭배는 죄악이니 이제부터 성상을 금지하겠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은 기독교 세력이 이슬람 세력에게 위기의식을 느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기독교의 가장 큰 라이벌인 이슬람교가 제국의 동쪽과 남쪽에서 비잔티움 제국을 위협하고 있었는데 이들의 종교는 교리에 따라 어떤 이미지도 사용하지 않는 순수성을 가졌고 이것이 번영을 이루게 된 원동력이라고 레오 3세가 판단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 문제는 단순히 기독교의 교리 논쟁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 비잔티움 제국의 혁신과 얽혀 있었다는 것이기에 우상 파괴 운동을 단순한 미술품 파괴로 비판할 수만은 없다는 것이 양 교수의 설명입니다.
그렇다면 레오 3세의 명령에 의하여 교회의 모든 조각과 미술이 사라졌을까요? 그렇지 않다고 합니다. 이탈리아의 보석 같은 도시 라벤나에는 갈라 플라치디아의 영묘와 산 비탈레 성당 내부에 아름다운 모자이크화가 살아 있습니다. 그 이유는 라벤나가 우상 파괴 운동 시기에 비잔티움 제국이 아니라 게르만족의 땅이기도 했지만, 라벤나를 포함해 이탈리아반도 서쪽의 종교 지도자들은 대부분 레오 3세의 입장에 찬성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교황이라고 할 수 있는 로마 주교 그레고리우스 2세의 입장도 레오 3세의 입장과 반대였습니다.
레오 3세가 선포한 우상 숭배 금지 결정에 불만을 품은 사람은 서유럽의 기독교 성직자뿐 만이 아니었습니다. 비잔티움 제국의 성직자를 포함한 당시의 많은 성직자들이 신의 형상을 조각이나 그림으로 나타내는 걸 불가피한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형상을 만드는 전통은 초기 기독교 때부터 이미 널리 인정돼왔고, 이를 한 사람의 결정으로 뒤집을 수는 없다고 본 겁니다.
그레고리우스 2세가 자신의 뜻을 거역하자 분노한 레오 3세는 로마 시로 군대까지 보냅니다만 결국 그레고리우스 2세의 뜻을 꺽지는 못합니다. 이 시기를 기점으로 기독교는 점점 동서로 갈라서게 됩니다. 공식적으로 콘스탄티노플을 중심으로 한 기독교는 정교회로, 로마 시를 중심으로 한 기독교는 로마 가톨릭으로 나뉘는 것은 1054년이지만, 이때 드러난 견해 차이에서 그 분열이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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