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터에서, 김훈 장편소설, 해냄 출간
김훈 선생의 글에서는 수고가 느껴집니다. 감정의 현을 건드리는 글들에서 활줄로 연주하는 것처럼 정성스럽고 정확한 음을 내려는 열정이 느껴집니다. 그렇다고 연주되는 이야기들이 화려하거나 수다스럽지 않습니다. 오히려 수다를 줄이려는 노력에서 감정은 더욱 증폭되고 함부로 뭐라 말할 수 없게 합니다. 사람의 감정을 읽는다는 것이 이렇게 무겁게 느껴지니 독자라는 이유로 어찌 수다를 떨 수 있겠습니까. 글쟁이가 글을 억제한다는 것이 마치 물속에서 숨을 참는 것 같을진대, 독자 또한 글을 읽는 동안 숨 쉬기가 쉽지 않습니다. 작가의 글을 읽으면서 선뜻 넘어가기가 어려웠습니다. 한 문장마다 인물들의 신산한 삶이 느껴져 종이 한 장의 무게가 침 묻은 손가락으로 넘기기에 버거웠습니다. 작가가 후기에서 기록한 말입니다.
‘나의 등장인물들은 늘 영웅적이지 못하다. 그들은 머뭇거리고, 두리번거리고, 죄 없이 쫓겨 다닌다. 나는 이 남루한 사람들의 슬픔과 고통에 대해서 말하고 싶었다.’
요즘 할리우드의 영화는 마블에서 만든 영웅들의 이야기로 가득 찹니다. 남 다른 초능력을 지니고 빌런들과 싸우며 정의를 세우는 이야기들입니다. 사람들이 이들 이야기에 푹 빠지는 이유를 저는 모릅니다. 디지털 기술이 발달하여 실사보다 뛰어난 현실감 있는 화면 때문인지, 빌런들을 처벌하는 통쾌함 때문인지, 현실의 어려움을 견디려는 몸부림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평을 하는 사람들도 있고, “의미는 무슨 의미?” 그냥 눈이 즐겁고 귀가 빵빵하고 이야기 전개가 빠른 오락물이니 좋다는 말도 듣습니다. 이들의 영웅담은 현실감이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런 영화를 잘 못 봅니다. 영화를 보기 시작하여 채 5분을 지속해서 볼 수가 없습니다. 작가가 말하는 영웅은 아마도 이들을 지칭하는 것은 아닌 듯합니다.
굴곡지고 왜곡된 시대를 살아낸 사람들 중에는 제법 출세를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도 있을 수 있습니다. 부정한 폭력을 이용하는 사람, 남의 불행의 줄을 타고 행운의 땅으로 건넌 사람, 타인의 삶을 파괴하면서 자신의 삶을 건설하는 사람, 아마도 작가는 이런 사람들을 영웅이라고 지칭한다고 저는 생각했습니다. 사람의 도리에 막혀 머뭇거리고, 끈질긴 인연의 끈들을 피해 두리번거리고, 태에서 태어나게 한 앞 세대의 강을 건너고, 회한의 안갯속을 헤매며 짓지도 않은 죄를 생각하며 쫓겨 다니는 사람들을 작가는 남루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도 작가는 이 남루한 사람들의 슬픔과 고통에 대해 말하고 싶었답니다. 슬픈 이야기라서 쓰고 싶었고, 고통이 난무한 이야기라 쓸 거리가 많아서 쓰고 싶었을까요? 아마도 아닐 것입니다.
오늘도 자화자찬 수다를 이어가는 사람들은 비문으로 만들 수 없는 말을 던집니다. 글은 기름이 자르르 흘러 등을 켜고 글을 읽기에 어지럽습니다. 정의와 공정을 얘기하는 속에는 불의와 차별이 넘칩니다. 원래 가지고 있던 단어의 뜻은 왜곡됩니다. 원래 말과 글은 무거운 것이었습니다만, 이제는 작은 바람에도 날아가는 겨가 되었습니다. 알곡을 덮었던 겨가 날아가는 것에만 시선이 집중되어 알곡은 개의치 않습니다. 시대가 어지럽습니다. 어지러운 시대를 살아냈던 사람들은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있는데, 영웅을 빙자한 자들의 말은 화살이 되어 허망하게 하늘을 날아다니고 있습니다.
만약 소설가가 허망한 화살과도 같은 말에 눈길이 가고, 중언부언하는 글로 포구 앞바다를 채운다면 우리의 삶을 실은 조그만 배들은 포구에 갇혀 오도 가도 못할 참극을 맞을 것입니다. ‘공터에서’ 들은 이야기가 너무 슬프고 고통스럽다고 해서 남루한 얘기로 들리지 않았습니다. 남루한 한 세대의 물줄기를 바다로 밀어내는 다른 한 세대의 물줄기가 흐르는 소리로 들렸습니다. 이들의 이야기가 강을 이루고 바다와 만나는 이야기로 들었습니다. 작가는 남루한 사람들의 슬픔과 고통을 이야기한다고 하지만 저는 한 시대를 산 영웅의 서사시로 읽었습니다. 작가가 ‘마음의 깊은 바닥에 들러붙어 있는 기억과 인상의 파편들을 엮은 글’은 결코 남루한 자들의 이야기가 아닌 것으로 저는 봤다는 말입니다. 비루하기로 따지면 빌붙어 흘린 권력과 재물을 핥는 자들의 이야기가 압권이지요. 하루하루를 죽을 둥 살 둥 살아낸 사람들의 이야기는 결코 그렇지 않다고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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