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만치 혼자서, 김훈 소설, 문학동네 중에서 ‘48GOP, 저만치 혼자서’
6.25 때 전사한 할아버지의 유골 수습 문제를 꺼내자 할머니가 갑자기 윗몸을 일으키며 소리를 질렀다. “안 돼. 들쑤시지 마. 냅둬. 제발 냅둬.”
임하사가 근무하는 48GOP 임무는 망원경으로 강 건너 북한군 GP를 관찰해서 상황일지에 기록하고 영상을 컴퓨터에 저장하는 일이다. 북한병들은 움직이지만 임하사가 있는 쪽에서는 그들을 그냥 둔다. 단지 기록하고 저장할 뿐이다.
임 하사의 할아버지 임종석 이등중사가 소속된 대대가 51년 7월의 양성 지구 전투에서 궤멸되었다는 것은 당시 사단 전황일지에 기록되어 있다. 양성 지구 전투 지역을 발굴하니 한 구덩이에서 남북한 양쪽의 유품이 모두 나왔다. 북한군 AK소총의 총열과 아군 M1 소총의 방아틀 뭉치가 같은 참호에서 나왔다. 북한군의 군화 뒤축과 수통, 아군의 인식표와 구멍 뚫린 철모가 뒤섞여서 출토되었다. 양쪽의 대검이 모두 한 구덩이에서 나왔다. 금이빨, 칫솔, 반지는 어느 쪽의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풍화된 뼈들도 흩어져 있었다. 뼈가 부서지고 조각들이 뒤엉켜서 발굴 상황만으로는 어느 쪽 뼈인지를 구분할 수 없었다.
48GOP의 임무가 그렇듯이, 할머니가 ‘냅둬’ 하듯이 서로 가만히 지켜보면 될 일이다. 건드리면 덧나고, 부딪히면 싸운다. 너나없이 싸우길 바라듯이 눈을 부라리고 험한 말의 화살이 시위를 떠나면 한 구덩이에 묻힐 위험에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소리칠 수 있다.
임 하사는 아무 일없이 제대를 한다. 기다리는 버스는 예정 시간이 지나도 오지 않는다. 임 하사가 기다리든 말든. 냅둬라고 말하는 듯하다.(48GOP)
도라지 수녀원은 수녀들이 노후를 의지할 곳이 없어서 오래 걱정하던 중, 교구청이 충청남도 바닷가에 호스피스 수녀원을 설립하고 늙은 수녀를 모신 수녀원이다. 사목은 장분도 신부이고, 김요한 주교가 책임을 맡고 있다. 교구청이 지은 이름은 ‘성녀 마가레트 수녀원’이었지만 ‘도라지 수녀원’이라는 이름은 누가 지은 것이 아니고 저절로 불리게 된 것이라 한다. 하얀 도라지 꽃은 다만 하얀색이 아니라 온갖 색의 잠재태를 모두 감추어서 거느리고 검은색 쪽으로 흘러간다고 오수산나 수녀가 한 말을 간병하는 젊은 수녀가 알아듣고는 문장을 만들어서 주보에 실어 유래가 된 것이다.
힘이 붙어있을 때, 나환자를 돌보거나, 기지촌의 여성들을 돌보던 수녀들이 이제는 속옷을 빨래하기에도 벅차고, 잠을 청하기도 어려운 노인이 되어 남은 힘을 모아 하나님 곁으로 가는 길을 곁에서 돌보고, 지켜보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아무리 가까이에서 도우려 해도 남의 도움에 불편해하는 수녀들, 남을 돕는 것에 길이 든 분들이 ‘저만치 혼자서’ 가는 길을 역시 ‘저만치 혼자서’ 지켜보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내가 살아냈고 앞으로 살아갈 나의 이야기이길 희망하게 된다.
(저만치 혼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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