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에세이

저만치 혼자서, 김훈 소설, 문학동네 중에서 ‘대장 내시경 검사, 영자’

무주이장 2022. 7. 1. 14:44

저만치 혼자서, 김훈 소설, 문학동네 중에서 대장 내시경 검사, 영자

 

 70이 넘으니 대장 내시경을 수면으로 하려면 보호자가 반드시 필요하단다. 삼십 년을 같이 산 아내와 다툼은 다 말할 수는 없지만 사소한 것들로 싸운 것이 사소하지 않은 것으로 쌓였고, 무의미한 것들도 쌓이면 무의미하지 않게 된다. ‘지겹다는 말이 여자만의 결론도 아닌 것이 지겹기는 마찬가지라 이혼은 쉽게 되었다. 황혼이혼, 이것 그렇게 충격적인 것은 아닌 모양이다. 딸이 전처와 나 사이를 왕래하며 소식을 전하는 것이 그 증거 같다. 불편한 것은 고작 수면 대장 내시경의 보호자를 데려가는 것 정도다. 가사 도우미에게 부탁하면 5만 원이면 해결되는 불편이다. 70년을 살고 나면 불편만 조금 있다. 그러나 사실은 고통은 세월에 마모되어 불편만 화석처럼 남은 것인지도 모른다.

 

 옛 연인의 소식을 듣고, 취직을 부탁한 그녀의 아들을 만나고, 팔려는 아파트의 가격을 얼마나 내릴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도 그저 대장 내시경을 받는 것과 별반 다를 것도 없다. 전에 다니던 직장 후배에게 이력서를 전달하고, 이혼한 아내와 친구이자 주례를 서 준 교수의 부고를 확인하고 문상을 가는 것도 약간 멋 적긴 해도 그리 성가신 일을 아니다. 모든 일의 무게가 그리 무겁지 않다. 용종 다섯 개를 잘라내서 그런가? 살 땐 그런 게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시시껄렁하다. 이것 역시 무거웠던 뼈와 근육은 풍화되고 풍화토만 시커멓게 남은 것이 볼 것 없어 그렇게 보이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대장 내시경 검사)

 

 노량진 고시촌에서 9급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아들에게 그랬다.

내년부터는 다달이 돈을 보내줄 수가 없으니 9급인지 10급인지 빨리 붙어서 너의 두 발로 서는 꼴을 보여다오. 네 아비 등뼈 휘는 꼴이 네 눈에는 안 뵈냐?”

고기도 잡히지 않아, 4.5톤 연안 자망 어선을 팔고 아버지는 아들에게 편지를 썼다. 그 돈으로 아들은 원룸의 전세금을 마련했다. 아들은 공무원 시험에서 한 번 떨어져 재수를 준비하고 있었다.

 

 생활비도 줄이고 젊음의 뜨거운 피도 식힐 수 있을까 해서 동거를 시작했다. 그러나 동거가 생활비를 약간 줄일지는 몰라도 구준생에게 크게 활력은 되지 않은 듯하다. 서로가 말해줘도 모르는 섹스 후기를 나누며 감정의 경계선을 확인하기만 했다. 같이 동거한 영자는 말해줘도 넌 몰라. 넌 니 꺼만 알게 되어 있잖아.”라고 말했고 동거남은 무참해졌다. 그렇다고 구체적인 무엇이 무참하게 만든 지는 동거남도 모른다. 영자의 말, “후반이 답답했어. 뭐가 얹힌 것처럼, 팍 터지지가 않았어.” 축구 경기의 해설자가 하는 말 비슷하지만 아들은 어떤 느낌인지 알 수가 없었다. 1년을 동거했다.

 

 가을, 9급 공무원에 합격하여 시골 마장면사무소에 서기보로 부임했다. 면사무소 총무계는 일이 정해져 있지 않았고, 그때그때 하는 일이 서기보의 일이다. 월급에서 방세 내고 밥 사 먹고 마을 노인들 환갑 칠순 팔순 구순 잔치에 축의금 내고 초상 때 부의금 내고 경로잔치 때 떡값 보내고 나면 남는 것은 없었지만 아버지의 돈을 받지 않고도 연명할 수 있게 된 것이 다행이었다.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다.

 

 1년을 동거한 영자의 신변에 대한 정보는 별로 없다. 만나고, 공부하고, 섹스하고, 헤어진 것만 있다. 전화를 해보았다.

지금 거신 전화는 고객의 요청에 의해 당분간 착신이 정지되어 있습니다는 안내만 들린다. 그래도 언젠가는 연락이 되고 부탁을 할지도 모른다. 아들의 취직 같은 것 말이다.

 

 젊은이의 삶이라고 고시촌이 있던 노량진 수산시장의 활어 같지는 않다. 살아 펄떡이는 것은 없고 물을 벗어나 헐떡이는 생선의 헛된 아가미질 같다. (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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