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내기 장기
‘1947년생이면 68이란다. 지금은 76이겠다.’ 이춘갑이 68이든 76이든 이춘갑의 인생이 별다른 게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습니다. 시큰둥하다는 표현이 그럴듯한 지, 아님 무던하다고 해야 하는지 조금 생각하게 합니다. 이춘갑이 과거와 현재를 둘러보고 얼마 남지 않은 미래까지 고개 한 번 돌리듯 쉽게 일별하는 모습에서 저는 인생의 경륜을 봅니다. 경륜이라고 하면 대통령이라고 뽑았더니 바보짓을 하는 덜 떨어진 경륜이 아니라 인생의 지름과 둘레를 말하는 것입니다. 엊그제 개방된 북악산을 올랐더랬습니다. 서울의 중심지고 개방된 지 얼마 되지 않아선지 젊은이들이 많이 보였습니다. 맞은편에서 오던 젊은 처자 넷이 두런두런 말을 이으며 오고 있었습니다. 스쳐 지나가는 말이 아가미에 산소가 걸리듯이 들렸습니다.
“전에는 무슨 일이든 자신있게 달려들었는데, 이제는 나이 드니 그게 쉽지 않아요.”
젊은이들은 인생의 지름이 꽤 길어, 인생이란 원을 돌기에는 아직도 많은 세월이 있다고 생각들 합니다. 재야 할 남은 인생의 지름이 많이 남은 게지요. 지나온 길도 아득했는데, 살아낼 날들이 많으니 당연히 나이들었다는 표현을 하는 걸 겁니다. 이춘갑은 68의 나이에 인생의 지름을 다 재고는 세상에 미련을 거둡니다. 이춘갑의 눈은 보이는 대로 보고, 모든 것을 받아들입니다. 인생 그것 그럴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가족을 건사하려다 외환 위기 때 구두공장을 닫습니다. 아내에 대한 최소한의 친절은 살던 아파트 한 채를 위자료 명목으로 주고 이혼하는 것이었습니다. 돈을 빌려준 채권자들이 눈을 시퍼렇게 뜨고 지켜보니 할 수 없이 별거가 길어졌고, ‘거리가 멀면 사랑도 멀어진다’는 말이 현실이 되는 것을 손을 놓고 확인합니다. 이혼 도장을 찍던 날 아홉 살 난 아들을 끌어안고 울면서 “괜찮아. 집만 있으면… 도장으로 사는 게 아니니깐. 그렇지. 영수야?”라고 말했지만 법률적 이혼은 누구도 이의제기를 못하게 합니다. 그렇게 16년을 살았던 이춘갑은 저녁 내기 장기를 둡니다. 장기의 상대라고 해봤자 이춘갑과 별다를 것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 오개남입니다. 몸에서 시큼한 냄새가 나는 오개남과 구두공장의 냄새가 아직도 빠지지 않았을 이춘개는 비슷한 물에서 호흡했을 것이라고 짐작합니다. 나이 몇 살 차이 난다고 “난 너와 달라”라고 호기롭게 얘기할 젊음이 없으니까요. 그 둘이 내기 후 저녁을 먹는 그림자에는 젓가락이 있었고, 움직이는 입도 있습니다. 당연히 때는 석양이 지는 때죠. 그렇게 그림은 낡고 오래되어 보는 내 심상이 허망합니다.
이혼 후 개인 회생한 뒤라고 해서 인생이 회생된 것은 아니지요. 이춘갑은 구두 수선 가게를 열고 호구지책을 삼습니다. 하지만 갑자기 시력이 떨어지고 손아귀의 감각이 무디어져서 구두 뒤축을 끌로 깍아내다가 자주 손을 다치고는 일거리를 줄이면서 십층 원룸을 빼서 월세를 줄이고 가게에 간이침대를 들여놓고 지낼 작정입니다. 회생은 공간도 줄이고 일도 줄이는 과정이 되었습니다. 인생, 늙으면 조금씩 줄여가는 것이 미덕이지요?
‘집을 삼억에 팔았어요. 반을 보냅니다. 김영자.’ 이춘갑의 전화기에 전 아내의 문자가 찍힙니다. 종이에 도장만 찍었다고 생각한 전 아내가 이춘갑이 준 아파트를 팔고는 받은 대금의 절반을 보냈습니다. 이춘갑이 아파트에 지분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전 아내가 돈을 보낸 것입니다. 이춘갑은 김영자가 아파트 판 돈 반을 보내온 것은 법률적으로 남일 뿐 아니라, 이로써 심정적으로나 인륜적으로나 삼인칭 타자가 되었다는 통고였을 것이라고 즉각 이해합니다. 나이 들면 헤어진 여자에게 술이 취해도 연락하지 않는 것이 가능해집니다. 그렇다고 무슨 자랑할 일은 아니지요. 그렇다는 말입니다.
이춘갑의 인생에서 그래도 달라지는 것은 저녁 내기 장기에서 지기도 하지만 이기기도 하는 것뿐입니다. 오늘과 내일이 다를 수 있다는 것에 그래도 기대라는 것을 하지요. 그렇다고 오늘과 내일이 제법 갈 것으로 기대는 못합니다. 하나씩 둘씩 주변이 정리되어 결국은 혼자 남는 서글픔을 피할 순 없지요. 같이 있고 싶어도 그러지 못하는 것은 유기견 센터에 데리고 있던 개를 맡기는 오개남이나 아내를 떠나보내는 이춘개나 서로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입장일 겁니다. 멀리 떨어져 기억 속에서나마 있어주면 좋겠지만 그것도 내 맘 같지는 않습니다. 김영자의 부고 소식이 옵니다. 문상을 망설이는 것도 잠시입니다. 기억 속의 사람을 보지 않고 지울 수는 없는 게지요. 장기판 멀리에서 조여오는 졸의 공세에 한궁이 허물어지듯 어쩔 수 없다는 핑계는 힘 떨어진 말입니다. 늙으면 말도 힘이 부치는 게 당연합니다. 아니라고 씩씩대는 모습이 더 처량할 수 있습니다.
소설의 끝은 이렇습니다.
‘다음날, 김영자는 화장되었고, 오개남은 옥탑방으로 이사했고, 오개남의 개는 새 주인을 만나지 못하고 공원 앞 유기견 센터 철망 안에 갇혀 있었다. 이춘갑은 오후에 공원 장기판에 나왔다. 오개남은 짐을 정리하느라고 공원에 나오지 않았다. 이춘갑은 손가락으로 눈꺼풀을 비집고 안약을 넣었다.’
세상 살아보면 다 비슷한 듯합니다. 20년을 넘게 산 아파트, 입주 때 화려한 과거를 자랑하시든 많은 분들이 요양원을 통과하여 나무옷을 입고는 떠났습니다. 부러워하던 것도 부질없었고, 자랑스러워했던 것도 부끄럽기만 합니다. 작가의 글을 읽으면서 몸에서 힘을 빼게 되는데, 이것 또한 나이 들면서 배울 일인 게지요. 그래도 서글픈 마음은 어쩔 수가 없습니다.
‘쫌, 힘 나는 얘기는 없을까요?’ 늙으면 별 걸 다 바랍니다. 미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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