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에세이

아연 소년들,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박은정 옮김 2.

무주이장 2022. 6. 22. 11:38

아연 소년들,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박은정 옮김 2.

 

세상에 악을 확장시키지 않으면서 어떻게 악의 한가운데를 지나가지?(S. 알렉시예비치의 법정 증언 중에서)

 

 강풀의 웹툰 조명가게를 재미있게 본 기억이 있습니다. ‘강풀 미스터리 심리 썰렁물이라는 부제를 달고 나온 만화였는데, 이게 처음에 볼 때 제법 무서웠습니다. 어두운 골목을 통과하고 조명가게를 가는데, 보는 저도 그 골목에 들어서는 것이 무서웠습니다. 강풀이라는 작가는 무척 따뜻한 이야기를 많이 그린 사람으로 기억하고 있었는데, 이런 호러물도 잘 그리는구나 감탄을 하던 중, 조명가게의 정체를 알게 된 후, 역시! 하고는, 감복했습니다. 유령이 등장하는 이야기를 하면서도 따뜻함을 잃지 않는 그의 자질과 성품에 감복했던 기억이 또렷합니다. 그의 만화는 워낙 유명하고 영화화된 것도 많아 제가 하는 이야기에 공감을 하실 분들이 많을 것으로 기대합니다.

 

 S. 알렉시예비치는 벨라루스의 저널리스트라고 합니다. ‘아연 소년들이라는 제목은 소련의 어린 병사들이 아프간에서 전사하면 입관시키는 아연이 도금된 관에 누운 소년병 즉 전사자의 관을 의미합니다. 아프간 전쟁에 참전한 어린 소년병들은 아무것도 모른 채, 아프간에 갔다가 그곳의 실상을 보고는 의미 없는 전쟁임을 깨닫게 됩니다. 아들들이 조국을 위하고, 아프간을 돕겠다는 이상을 품고 집을 떠날 때, 어머니들의 막연한 불안감은 차가운 시신, 조각난 시신으로 아이들이 집으로 돌아왔을 때, 망연자실 삶의 희망을 놓치고 맙니다. 아프간에서 다쳐 귀향한 군인들의 참혹한 경험은 정상적인 생활을 하지 못할 정도로 그들을 피폐하게 만들었습니다. 작가는 그들을 만나 이야기를 듣고 정리한 후 출판했습니다. 3만 명의 소련군이 남의 나라 아프간에 침공하여 대통령을 살해하고 친소 정권을 세웠지만, 무슬림 세력의 무장 투쟁으로 위기를 맞은 친소파가 요청하여 참전한 것이 소련의 침공이었고, 이 침공은 결국 실패하고 맙니다. 명분도 실리도 없는 전쟁이었고 이민족에 대한 살해행위였다는 것이 인터뷰이들의 증언 속에서 녹아 흐릅니다. 참전군인들은 오히려 전쟁범죄인으로 전락한 듯한 입장에 당황하기도 합니다.

 

 참전 군인들의 증언 속에는 다시 전쟁터로 갔으면 좋겠다는 말도 있습니다. 전장에서 돌아온 후의 생활에 적응을 할 수 없었다는 것이지요. 가서 적이 보이면 쏘고, 명령에 따르는 것이 쉽다고 합니다. 전쟁을 경험한 후 전쟁의 상흔, 전쟁의 부조리를 극복하지 못하고 전쟁에 짓눌린 경우입니다. 우리는 보통 어떤 환경 속으로 들어가면 환경에 적응하고 물들기 쉽습니다. 공포물을 보면 때려잡을 귀신에 분기탱천하고 영화관을 나와서도 귀갓길에 여기저기 유령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공포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합니다. 공포 속을 통과하면서 공포를 퍼뜨리는 일을 많이 하지요. 보통의 사람들이 거의 다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미움을 얘기하면 미움이 커지고, 불안을 방송하면 불안은 더 커집니다. 거짓말은 할수록 더 부풀죠. 참전군인들의 이야기와 아들을 잃은 어머니들의 이야기가 가득 든 이 책을 읽으면서 전쟁을 일으킨 전쟁 주동자들에 대한 미움, 전쟁터에서 미친 사람들에 대한 격분, 아프간 전쟁에 대한 증오 같은 부정적 심정은 가슴속으로 쉽게 들어오지 못합니다. 대신, 군인 한 사람 한 사람, 어머니 한 분, 한 분에 대한 연민과 그들의 삶이 더 피폐하지 않기 만을 기도하게 됩니다. 이렇게 되는 이유는 고소를 당한 후 법정에서 작가가 한 말에 답이 있을 것 같습니다.

세상에 악을 확장시키지 않으면서 어떻게 악의 한가운데를 지나가지?

작가는 매번 새 책을 내기에 앞서 스스로에게 질문을 한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악을 얘기하면서도 악을 확장시키지 않으려는 마음이 내 속에서 터지기를 기다리는 미움, 증오, 격분의 뇌관이 터지지 않게 한 것이지요. 악마가 벌인 놀이에 빠져 불행을 당한 사람들을 얘기하면서 악마보다는 상심한 사람들을 위로하는 책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강풀의 조명가게에서 교통사고를 일으킨 사람에 대한 미움보다는 그를 연민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도 역시 같은 이유일 것 같다는 생각이 이어지면서 선한 사람들의 영향력이 한층 더 커지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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