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에세이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박은정옮김. 문학동네

무주이장 2022. 6. 11. 15:55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박은정 옮김. 문학동네

 

2차 세계대전에서 소련 측 피해는 전사자가 2천만 명이 넘는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검색 결과 소련의 사망자 수는 2900만 명이라고 합니다. 2900만 명의 생명이 남긴 이야기는 각각의 사람마다 다른 이야기들이었을 것입니다. 거기에다 이들 사망자의 가족들이 남긴 이야기를 합치면 우리는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도 다 듣지 못할 파란색, 붉은색, 노란색의 형형색색 이야기들일 것입니다. 인간의 생명이 소멸하는 전장의 이야기는 지금도 장엄하고 진지합니다. 그래서 이들의 이야기는 소설과 영화, 드라마들로 나오고 있습니다. 전장의 영웅담도 있고, 적군의 간악함을 고발하는 것도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들의 공통점은 이 이야기들의 주인공이 대부분 남자들이란 겁니다.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는 전쟁 이야기를 썼지만 남자들의 이야기가 아닌 여자들의 이야기를 기록했습니다. 소련은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100만 명에 이르는 소녀병들이 자원입대를 했습니다. 정규군으로 참전한 것 외, 빨치산 유격대의 형태도 있었고, 지하 연락병으로 정보를 수집하는 여성 병사들도 각각 같은 숫자였다고 하니 모두 합치면 300만 명의 여성이 참전을 한 것입니다. 이들의 이야기를 수집하여 정리해서 작가는 책을 엮었습니다. 이들의 이야기를 모은 책의 제목이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입니다.

 

소련의 장교는 결코 포로가 되지 않는다. 우리에게 포로는 없다. 반역자만 있을 뿐!(스탈린)

 전쟁이 끝나고 포로를 교환하면서 제 아버지는 돌아오지 않는 다리를 넘어 남한 땅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제가 자라는 동안에도 전쟁 이야기는 많이 하시지 않았습니다. 참전한 후 중공군에게 잡혀 포로가 되어 북한군과 함께 북한 전역을 끌려 다니다 발진티푸스로 죽을 고비도 넘기고 한반도에서 가장 춥다는 중강진까지 갔다가 돌아온 것입니다. 고향집에 오셨을 때, 이미 집에서는 전사를 한 것으로 알고 제사까지 지냈다고 합니다. 고모부가 귀향한 아버지를 보고 느낀 소감이 이랬다고 합니다.

얼굴이 까맣고, 바짝 마른 사람이 집으로 들어오는데 흑달에 걸린 사람처럼 보였고 마치 죽은 사람 같았다.” 이런 아버지는 사회생활을 하면서 많은 감시를 받았던 듯합니다. 포로교환 후 군부대에서 조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기 전 부대에서 대기하고 있었던 시간도 제법 많았던 듯했고, 그리고 귀향 후에도 특무대나 경찰서에서 자주 방문을 했던 것으로 어머니는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세월이 있었습니다. 우리 집안에도.

 

 제가 대학을 준비하면서 육군사관학교로 진학을 결심하고 시험을 쳐서 1차 합격을 한 후 체력시험을 치러 태릉의 육군사관학교를 방문한 경험이 있습니다. 체력시험을 준비하면서 가장 어려웠던 것이 턱걸이였습니다. 배치기가 허용되지 않고 순전히 팔 힘으로 2개를 해야 했습니다. 전 그게 그렇게 어려웠습니다. 배치기를 하면 스무 개도 하는데 말입니다. 열심히 연습해서 딱 2개만 했습니다. 체력시험도 통과했습니다. 자랑이겠지만 면접을 하면서 시험관들끼리 하는 말에서 성적이 우수하다는 것을 짐작했고, “입학하면 열심히 하라는 격려의 말도 들었습니다. 그런데 불합격이었습니다. 신원조회에서 떨어진 것입니다. 아버지는 본인 탓이 아니라고, 몇 번을 말씀하셨습니다만, 아버지의 참전과 포로교환의 이력 외에는 달리 불합격의 이유를 들 수가 없었습니다.

 

 전쟁이 남긴 우리 집안의 이야기는 그저 이 정도 에피소드입니다. 아버지는 직업을 두 번 바꾸시고 가정을 근사하셨고, 전 육군사관학교의 불합격이 그리 큰 아픔도 아닌지라 대학을 진학했고 졸업 후 그런대로 역시 가족을 근사하며 살았습니다. 아버지가 나중에 국가로부터 받은 것은 참전용사가 받은 작은 연금이었고, 돌아가신 후는 보훈병원 장례식장을 이용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소련의 경우 스탈린은 참전용사들을 가혹하게 대했습니다. 특히 포로가 되어 돌아온 참전용사들은 반역자로 몰아세웠습니다.

 

발렌티나 예브도키모브나 엠-, 빨치산 연락병으로 참전했던 여성의 증언이 책에 있습니다.

전선에서 남편이 살아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남편이 이상했다고 합니다. 돌처럼 굳은 채 웃지도 않고 자기를 안지도 않았다는 겁니다. 남편이 몸을 다쳤는가 싶어 가슴이 덜컥했지만 살아 돌아왔다는 사실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남편과 딱 하룻밤을 보냈습니다. 딱 하룻밤. 다음날 어떤 사람들이 아침부터 찾아와 문을 두드렸고, 남편은 사람들이 올 걸 미리 알고 담배를 피우며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남편은 루마니아, 체코를 거쳐 러시아로 돌아왔고, 포상으로 받은 메달도 가졌는데, 그런데도 공포에 질려 있었다고 합니다. “남편은 심문을 받고, 그것도 모자라 벌써 두 차례나 국가검열을 마친 상태였어. 당국은 남편에게 포로였다는 낙인까지 찍었더라고. 남편은 스몰렌스크 근처에서 포로로 붙잡혔어. 포로로 잡혔으니 당연히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 했지. 남편은 그러고 싶었대. 다만 탄환이 일찍 떨어지는 바람에 적과 싸우기는 고사하고 남편 일행에겐 스스로를 쏘아 죽어버리려야 죽을 탄환조차 남아 있지 않았어. 지휘관은 남편이 보는 앞에서 돌로 자기 머리를 내리쳤어. 마지막 남은 탄환이 불발되자 그런 거야. 바로 남편 눈앞에서

 

 소련의 장교는 결코 포로가 되지 않는다. 우리에게 포로는 없다. 반역자만 있을 뿐!’ 스탈린 동지가 한 말이지.

 

 남편은 7년이 지나서야 집으로 돌아왔어. 아들과 나는 남편이 전쟁터에서 돌아오기를 4, 그리고 전쟁이 끝나고 다시 콜리마 수용소에서 돌아오기를 7, 그러니까 11년을 기다린 거야. 아들은 그 사이 어른이 돼버렸지. 반역자의 아내. 정말 죽지 못해 살았어

이제야 모든 걸 말할 수 있게 됐어. 묻고 싶어. 전쟁 나고 몇 달 사이에 수백만의 병사와 장교들이 포로로 붙잡힌게 누구 때문인지? 알고 싶어. 전쟁 전에 우리 붉은 군대의 훌륭한 지휘관들을 독일 첩자니 일본 첩자니 몰아세우고 총살시켜서 다 죽여버린 게 누구지? 정말 알고 싶다니까. 히틀러가 탱크와 전투기를 만들며 전쟁을 준비하고 있던 그때 부됸니 기병대만 믿고 두 손 놓고 있던 게 누구냐고? 누가 우리 국경은 철통같이 튼튼하다이따위의 말로 우리를 안심시켰느냐 말이야? 전쟁 나자마자 우리 군대가 탄환 남은 거나 걱정하는 신세가 된 게 누구 책임이냐고

 

 어디선가 많이 듣던 말, 익숙한 말들입니다. 전쟁이 나면 점심은 평양에서 먹겠다며 호기를 부리던 사람은 피난민이 다리를 건너는 중에도 한강 다리를 폭파하라고 명령하고, 서울을 사수하겠다는 방송을 하던 사람은 벌써 대전까지 줄행랑을 쳤지요. 소총 하나 제대로 조준하지 못하던 지도자도 있습니다. 요즘은 원점 타격을 외치는 사람도 있지요. 전쟁을 원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호기만을 부리는 언어는 폭력에 지나지 않습니다. 조용히 탱크와 전투기 미사일을 만들며 함부로 우리를 건드리지 못하게 대화도 하고, 힘도 보여줘야 합니다. 입만 나불대면 건질 게 별로 없는 것은 동서고금을 구분하지 않습니다.

 

 정치는 여자가 해야 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정치를 남자들의 전유물인 것 같이 떠벌리는 남자들이 하는 일이 고작 전쟁입니다. 러시아가 절대 침공하지 않는다며, 나토에 가입을 시켜줄지도 모를 일, 아니 애초 가입이 되지도 않을 일을 떠벌리며 전쟁을 벌었던 정치인도 우크라이나의 남자 대통령입니다. 이 남자보다 더 나쁜, 전쟁을 일으킨 놈도 푸틴이라는 늙은 남자 정치인입니다. 여자가 정치를 하면 적어도 전쟁은 덜 일어날 것이라는 기대가 근거가 없는 것일까요?

 

 책을 읽던 중, 독일과 싸운 여성 참전 소련군 중 우크라이나 출신이 유독 많았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아마 현재의 우크라이나와 러시아가 전쟁 중이라 유독 더 기억이 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같이 총 들고 독일과 싸웠던 러시와와 우크라이나가 이제 서로 총부리를 겨누고 싸운다는 것이 서글픕니다. 전쟁은 그때나 지금이나 이렇듯 서글픈 것임을 이 책의 여성 참전 용사들은 조용히 전합니다.

예스24 이미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