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열의 시대, 부정의 시대, 라이벌의 소멸을 꿈꾸다.
이제 종교개혁이 일어난 후의 북유럽의 상황과 북유럽의 상황에 대처하면서 변화하는 가톨릭교회의 상황을 알아보겠습니다.
루터가 시작한 종교개혁의 불씨가 유럽 전역으로 거세게 번지는 상황을 로마 교황청은 심각하게 바라봤을 겁니다. 교황을 중심으로 한 교회의 권위가 송두리째 흔들린다고 느꼈기 때문이죠. 이때 교황청이 느꼈을 위기감을 잘 보여주는 그림이 하나 있습니다.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이 그것입니다. 미켈란젤로가 시스티나 예배당의 천장화를 완성한 지 20년 만에 이 예배당에 그린 그림이 ‘최후의 심판’입니다. 이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1536년은 신성로마제국 카를5세가 파견한 군대에 의해 로마가 약탈당하고(이때 로마를 약탈한 주체는 카를 5세가 고용한 독일 용병들로서 신교 세력들입니다) 북유럽에서 시작한 종교개혁이 준 충격에 빠져 있을 시기입니다. 교황은 이 그림을 통해 자신의 권위에 도전하는 여러 세력에게 준엄하게 경고했습니다. 결국 신의 노여움을 보여줌으로써 교황의 권위를 다시 회복하고자 이 그림을 그린 것이죠.
교황청은 종교개혁의 초기, 불길을 진화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신교 세력의 확장을 막는 데에 급급했죠. 그러나 이제는 신교들이 교리로 가톨릭 교회를 공격하는 것에 정면으로 맞서 대대적인 반격에 나섭니다. 이러한 가톨릭 교회의 움직임을 ‘카운터 리포메이션’이라고 부르는데, 우리말로는 ‘반종교개혁’ 또는 ‘가톨릭 종교개혁’이라 합니다. 크게 보면 가톨릭 내부에서의 자정 운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트리엔트 공의회가 가톨릭 자정 운동에서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합니다. 공의회는 교회 내 미술의 역할을 계속 인정했지만, 앞으로는 바람직한 기준을 엄격하게 적용해서 제작해야 한다고 결론을 냅니다. 이에 따라 이후 종교미술은 많이 바뀌게 됩니다. 검열의 시대가 도래한 것입니다.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최후의 심판’ 속 인물을 주로 누드로 그렸는데 이 누드화에 대한 검열이 시작된 것입니다. 결론은 그림을 지우라는 비난과 비판에 대하여 그림을 지우지 않는 대신 누드의 주요 부분만 옷을 입혀 다시 그렸습니다. 미켈란젤로가 죽은 후, 그의 제자 다니엘라 다 볼테라가 대대적으로 수정을 했습니다. 볼테라는 이렇게 스승의 작품에 속옷을 입히는 작업을 해서 사람들이 그를 ‘기저귀 화가’ 또는 ‘속옷 화가’라고 조롱하기도 했습니다.
종교미술에 대한 엄격한 기준과 이에 따라 열리는 종교재판은 유럽에서 가장 자유로운 베네치아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예를 들어 파올로 베로네세가 그린 ‘최후의 만찬’이 ‘레위가의 만찬’으로 바뀐 사연도 그렇습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과 달리 그냥 시끌벅적한 잔칫집 같은 그림인데요. 이것이 성스러운 장면이 되어야 함에도 일상적, 세속적인 장면이 교차하는 그림때문에 파올로 베로네세는 그림을 완성하자마자 종교재판을 받게 됩니다. 베로네세가 1573년 7월 18일에 종교재판관에게 심문받은 기록이 상세히 남아 있는데 여기서 이 그림의 모든 요소 하나하나를 날카롭게 지적 받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옆에서 고기를 해체하고 있는 베드로가 왜 그런 일을 하고 있는지, 그림에 왜 광대가 등장하는지 등을 조목조목 지적 받습니다. 베로네세는 재판관의 날카로운 지적에 요리조리 잘 피해가면서 답합니다. 자칫 잘못하면 목숨을 내놔야 하는 무시무시한 상황에서도 나름 잘 방어해냈지요. 종교재판관들은 당시 북유럽의 신교지역에서 가톨릭 교회의 전통적 성화를 비튼 듯한 그림이 그려지는 것을 알고 있어서 베로네세의 그림도 순수하게 성화라고 받아들일 수 없었던 때문이라고 하지만 정도가 지나친 검열이 아닌가요? 최종적으로 종교재판관은 3개월 안에 적절한 양식으로 다시 그리라고 판결합니다. 베로네세는 그림을 전면적으로 수정하기보다 제목을 수정하는 방식으로 대처합니다. ‘최후의 만찬’이 아니라 성경에 나오는 ‘레위가의 만찬’이 제목이 된 겁니다. 아쉽지만 적절한 대처였습니다. 누가복음 5장 29-32절을 읽어보면 아실 겁니다.
가톨릭 교회와 신교의 대립은 이렇듯 그림 속의 인물들의 등장도 용인하지 못할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신교와 구교의 라이벌관계는 서로의 존재를 부인하며 제거하는 힘으로써 작용을 했습니다. 신교는 우상숭배 논쟁에서 시작한 우상파괴운동을 일으켜 가톨릭 교회의 미술품들을 훼손하면서 가톨릭 교회의 존재를 거부했고, 가톨릭 교회는 교회법의 잣대로 미술품까지 검열하며 신교의 존재를 거부했습니다. 자신감 넘치든 르네상스 초기의 교회는 그들의 포용력을 상실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신교에게서 빼앗고, 그들 만의 세계에 한정시켜버렸습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은 이때부터 두 몸으로 쪼개어져서 구교와 신교의 세계에 갇혀버린 것이 아닐까요?
라이벌의 존재는 두 가지의 힘으로 작용합니다. 기분 좋은 긴장감을 유지하면서 서로가 서로의 발전을 추동하는 에너지가 될 수도 있고, 서로의 존재를 부인하며 말살하려는 광기가 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다만 미술에 한정되기만 한다면 양정무 교수님의 ‘미술이야기’를 편하게 읽을 수 있으련만, 미술이야기는 역사이야기이고, 정치이야기이기도 하니 긴장을 하면서 읽은 것이 이유가 없다고도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최근 북한이 다시 방사포인지 미사일인지를 연이어 쏴 댑니다. 지난 정권에서는 이럴 경우 확인되기 전에는 ‘미상의 발사체’라고 표현한 것을 야당에서는 “탄도탄을 탄도탄이라고 하지도 못하는 정권”이라며 비판을 했지요. 정권이 바뀌자 전 정권의 잘못을 비판하고 흔적을 지우기 위하여 표현한 말이 ‘미상의 탄도탄’이라는 표현으로 발표를 했다고 합니다. 무엇이 이상한지 아시겠습니까?
‘미상의 양정무 교수 책’ ‘난생 처음 한번 공부하는 미술이야기 7권’을 읽었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이해가 가시나요?
라이벌을 제거하기에 열중이어서 자신들의 발표가 개념이 어울리지 않는 단어의 결합임을 알지도 못한다면 단지 언어의 문제라고 축소해서 가볍게 넘길 일이 아닌 것 같아 걱정입니다. 다신 검열의 시대가 오지 않는다는 확신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YES24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매일 에세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지음, 박은정 옮김 2 (0) | 2022.06.13 |
---|---|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박은정옮김. 문학동네 (0) | 2022.06.11 |
난생 처음 한번 공부하는 미술이야기(7권 르네상스의 완성과 종교개혁) 양정무 저, 사회평론 간행 2 (0) | 2022.06.06 |
난생 처음 한번 공부하는 미술이야기(7권 르네상스의 완성과 종교개혁) 양정무 저, 사회평론 간행 1 (0) | 2022.06.06 |
가불 선진국, 조국 지음. 체크리스트를 만들 생각이 들었다. (0) | 2022.05.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