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에세이

셀피, 윌 스토 지음, 이현경 옮김, 글항아리 출간(7)

무주이장 2022. 3. 17. 15:46

셀피, 윌 스토 지음, 이현경 옮김, 글항아리 출간(7)

 

완벽주의 시대에서 살아남는 법

 

 문화를 정의하는 격언 중 하나로, 원한다면 뭐든 될 수 있다는 말이 있다. 신자유주의적 게임에서 이기기 위해서 우리는 그저 꿈꾸고, 이 꿈에 마음을 쏟아붓고, 이를 몹시 원해야 한다. 우리는 이것을 내면화하여 자아의식에 편입시킨다.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사실 이것은 완벽주의 시대의 본질에 있는 거짓말이다. 그리고 나는 이것이 수많은 불행의 원인이라고 생각한다. 우리에겐 한계가 있다. 불완전하다, 그리고 이는 어쩔 수 없다.

 

 우리가 확인한 것처럼 우리의 신경 연결은 자궁에서 나올 때 완성된 것이 결코 아니다. 우리가 누구인지의 핵심은 사실상 우리가 무력한 상태인 인생의 초기 단계에 설정된다. 생명 활동, 문화, 경험에 의해서 일부는 선천적으로 또 일부는 환경적으로 만들어진다. 내 성격이 정말로 어떤지를 이해할 수 있을 만큼 나이가 들어서 성격을 바꾸기 위해서는 뭔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을까 생각하기 시작할 때쯤에는 모든 것이 대부분 결정돼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절대 변할 수 없고 변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다. 사람은 성장하고 원숙해지며 많은 것을 배우고 더욱 지혜로워지고 노련해진다. 외상적 사건은 사람들에게 피해를 입힐 수 있으며 개인적인 위기에서 회복되면 신경증적인 성격을 나타내는 특징은 사라지게 된다. 우리의 완벽함 모델을 얼마나 성공적으로 충족시키느냐의 상당 부분은, 우리 안에 존재하는 신경적 메커니즘에 달려 있으며 우리는 이를 변화시킬 능력이 없다.

 

 이 길고 경이로운 여정에서 내가 깨달은 가장 놀라운 것은 스토리텔링이 부족의 선전 활동의 한 형태라는 것이다. 수렵 채집민이었던 조상들의 이기적인 사람과 이타적인 사람들에 대한 소문이 구성원들에게 호되게 얻어맞고 배척당하는 악당이 되기보다는 이타적인 영웅이 되라고 가르침으로써 부족을 지배하는 데 도움이 되었듯이, 오늘날에도 이와 같은 메커니즘이 강력한 사회적 압력을 행사한다. 신자유주의적 이야기들은 이상적 자아의 형태가 있다고 은밀하게 우리를 설득한 다음 우리를 위해 이상적 자아를 정의한다. 우리는 이 이야기와 영웅을 내면에 흡수한다. 우리는 우리 부족의 이야기를 우리 이야기로 만든다. 우리는 이를 우리의 소문과 스토리텔링 속에 퍼지도록 하고 이 음모에 무의식적으로 가담한다. 그러고 나서 영웅이 되고자 노력한다. 너무 자주 우리는 실패한다. 바로 그때 위험한 완벽주의적 사고가 촉발될 수 있다. 우리는 우리가 이 게임의 패자라고 판단하게 된다. 우리는 자기혐오를 느낀다. 심지어 이미 자살, 자해, 섭식 장애에 대한 끔찍한 통계에 수치를 더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러한 이야기가 우리에게 말해주지 않는 것은 이 모든 것이 거짓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문화 속에서 자라났고, 당연히 상당 부분 그 문화가 될 수밖에 없다. 문화의 요구에 완전히 귀를 닫아버릴 수는 없다. 나의 어떤 부분은 항상 내가 친구가 더 많았으면, 더 부자였으면, 더 말랐으면, 더 매력적이었으면 하고 바란다. 하지만 완벽하다는 것은 어떤 환상이고 부족의 선전이라는 것을 아는 것만으로 깊은 위안이 되었다. 마음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완벽함을 위한 전쟁을 막는 것은 단지 첫걸음일 뿐이다. 리틀 교수는 자신을 바꾸지 않고도 우리가 느끼는 방식을 바꾸는 방법을 설명한다. 내가 생각해 낸 방법은 우리가 가진 목표들을 바꾸고자 노력하는 것이다.

 

 만약 자아가 이야기라면, 우리가 그토록 원했던 것은 통제하고 있다는 환상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그 어떤 것도 정말로 통제하지 못한다. 궁극적으로, 우리는 실제로 모두가 완벽하지 않으며 우리 중 누구도 완벽할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함으로써 위안을 얻을 수 있다.

 

 내 연구는 사실 우리가 상당 부분 문화 그 자체임을 암시했다(그렇게 길게 설명했던 모든 것이 문화 이야기였다)

 

 이 책의 저자 윌 스토가 주장하는 그의 말을 따라왔다. 많은 내용이었고 따라가면서 길을 잃기도 했다. 그래서 정리를 하면서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이 책을 읽기 전에 정리한 것을 읽는 것도 나름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수많은 내용을 요약하면서 새로운 사실도 확인했다. 뇌량 절제술(뇌 분리 수술)도 그중 하나다. 사진으로 보는 내 모습과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 왜 차이가 났는지를 알았을 때의 놀라움이란 지금도 가슴 설렌다. 우리가 책을 읽는 이유 중 하나다. 새로운 것을 접하고, 익히 아는 것을 확인하고. 이 책을 접하는 모든 분들은 우리 뇌가 속이고, 우리 사회가 속인 우리의 자아을 제대로 이해했으면 한다. 우리는 모두 생존 본능을 가지고 있다. 죽기를 원하는 생물은 없다고 확신한다. 그럼에도 자살을 하는 것은 특별한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특별하기에 소중한 것이 아니라 특별하기에 이상한 현상인 것이다. 이상한 것을 치유하는 방법은 정확한 현실 인식 위에 터를 잡아야 한다고 믿는다.

 

 정확한 현실 인식은 생존을 위한 필수 요소라고 믿는다. 새로운 정권이 만들 5년을 예측하고, 분석하고 대처하는 것도 이와 같을 것이다. 우리 모든 인간의 행동은 자아가 시킨다고 믿는다. 이 자아가 무의식적이지 않고, 미신도 아니며,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고 믿으며, 달려가려고 할 것이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이 책을 상기하라. 우리의 자아는 우리가 그렇게 자랑할 만큼 대단한 것도 아니며, 믿을 만한 것도 아니라는 것을.

 

 이 긴 글을 읽고, 저 긴 책 셀피를 읽는 용기를 가지길 희망한다.  

 

PS : 책의 내용 중 유비와 제갈량의 삼고초려와 혼돈하여 잘못 쓴 글이 있었다. 유비가 공자를 찾아온 것처럼 표현한 것이다. 본문은 다음과 같다.

한번은 자신을 찾아온 유비를 보지 않으려 꾀병을 부리고는 불쌍한 유비가 자리를 뜨자 거문고를 타며 다 들리게 노래를 불러 유비 자신이 모욕당한 것임을 알게 했다’(96)

 

여기서 자신은 공자를 말하는 것이다. 제갈량과 유비의 만남 고사인 삼고초려를 공자와 유비의 만남으로 착각한 것이다.

공자의 생멸시기는 BC551년 주의 제후국인 노나라에서 출생하고, BC47973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유비의 생멸시기는 16179일 태어나 2336.10일 사망하였다. 향년 72세였다.

제갈량의 생멸시기는 181년 태어나 234 54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책에서의 내용은 유비가 공명을 초빙하기 위하여 공명의 집을 세 번 방문한 고사를 설명하는 것으로(三顧草廬) 작가가 잘못 들었거나, 김 교수가 잘못 알려준 것으로 추정된다.(인터넷 검색의 유쾌함이여 영원하라~!)

예스24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