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에세이

셀피, 윌 스토 지음, 이현경 옮김, 글항아리 출간(4)

무주이장 2022. 3. 17. 15:12

셀피, 윌 스토 지음, 이현경 옮김, 글항아리 출간(4)

 

부족으로서의 자아, 완벽할 수 있는 자아, 착한 자아

 

 지난 글에서 자아가 어떻게 작용하여 생성되는가에 대한 자연과학적인 연구결과를 인용하였다. 이제 저자는 뇌를 가진 인간의 지각 능력 외에 사회 구성원에 의해 습득, 공유, 전달되는 행위 양식을 말하는 문화적인 과정을 소개하기 시작한다. 저자는 21세기를 완벽주의를 추구하는 자아라고 정리한다. 완벽주의 자아가 어떻게 형성되었는가를 정리해본다.

 

 우리는 부족적이다. 우리는 지위와 서열에 집착한다. 이는 침팬지 무리와 마찬가지이다. 침팬지도 다른 부족들을 공격하기 위하여 하나로 뭉치기는 인간과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우리가 속한 내집단에 편향되어 있으며 다른 이들에 대해서도 편견을 가지고 있다. 이는 무의식적이다. 명성에 대한 강박적인 집착은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신경 쓰게 한다.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신경 쓰는 것은 인간의 커다란 관심사 중 하나다. 명성은 소문을 먹고 산다. 소문은 중요한 정보를 알아내기 위한 방법일 뿐 아니라 부족을 통치하기 위한 수단이다. 중요한 규칙을 어긴 사람에 대한 이야기는 강력한 도덕적 분개심을 일으켰을 것이고 이는 가혹한 처벌로 이어졌을 가능성이 크다. 사람들은 자신이 성난 군중만큼이나 도덕적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들이 이런 행동에 휩쓸릴 때 사실 그들은 잔인하고 원시적인 힘에 의해 움직이게 되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이 천사인 줄 알지만, 사실은 유인원이다. 우리에게 실제로 완벽한것이 어떤 것인지를 정의 내리는 것은 대체로 우리 부족이다.

 

 개인주의는 고대 엘라다(그리스)에서 만들어졌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만물은 완벽함을 지향한다고 생각한 것이 이슬람 세계 사람들을 거쳐 유럽 사람들에게 알려지면서 우리 삶이 잠재된 완벽함을 향해 나아가는 패턴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고 싶어 했다. 좌절을 겪을지라도, 우리는 점점 더 나아지고 있으며 완벽에 가까워지고 있는 것이다. 건강하고 행복한 두뇌는 우리가 이런 기분을 느끼도록 온갖 교활한 속임수를 쓴다. 심리학자 댄 매커덤스 교수는 우리는 문화로부터 이야기를 도용함으로써우리가 누구인지에 대한 감각을 기른다, 우리 삶을 신화로 바꾸는 것이 성인기의 모든 것이다고 설명을 한다. 하지만 모든 문명화된 사람의 집단이 당연히, 속절없이 한 가지 이상향을 향해 몰려가는 것은 아니다. 중국의 경우는 유럽과는 달리 개인주의가 허용되지 않았다. 개인의 성공이 아닌 조화를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 중국의 완벽주의 자아였다. 동양의 영웅은 악에 맞서 싸우고 진실이 승리하며 사랑이 모든 것을 정복하는 서양의 영웅에 관한 스토리텔링이 아니라, 희생하는 사람이며 가족과 지역사회, 나라를 보살피는 사람으로 이야기가 만들어진다(모든 책은 다루는 범위가 제한적일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하나마나한 설명이지만 친절하다고 느낀다)

 

 고대 엘라다 세계(신 중심의 세계)의 몰락은 수년간의 분열과 전쟁으로 이어졌다. 신 중심의 세계에서 인간이 신의 신성한 대리자를 신뢰할 수 없어지면 인간의 운명이란 순전히 개인의 문제라는 것이 유일한 결론일 듯하다. 만약 우리 운명이 이제 개인의 문제라면 이는 완벽의 추구를 내면의 일로 돌린다는 뜻이다.

 

 기독교는 결국 고대 세계의 몰락에서 비롯되었다. 기독교는 완전히 새로운 사회적, 경제적 지형을 형성하고 강화하면서 수 세기 동안 성행했다. 엘라다인들에게 있어 본질적으로 가치 있는 개인은 포상과 명성, 공동체의 은혜를 받기 위해 완벽해지고자 노력하는 이였다. 기독교인들은 그 투쟁을 이어받아 이를 내면으로 돌렸다. 이것은 내면의 자아를 더 훌륭하게 만들기 위해서 기도와 자기부정, 채찍질로 계속되는 싸움이었다. 기독교인들이 덧붙인 것은 내면성이었다. 15세기에 고대 엘라다와 로마의 사상은 마침내 서구 자아를 숨 막힐 듯한 공기 중으로부터 끄집어내기 시작한 르네상스를 겪었다. 현대 심리학 시대가 시작되었다. 하지만 프로이트의 본질적 견해는 사실 오직 관점의 변화로 여겨질 뿐이다. 인간은 여전히 악한 존재였다. 그들은 여전히 치료되어야 했다. 그 치료법은 여전히 출생과 동시에 도덕적으로 타락하게 된 내적 자아와 영원한 전쟁을 하는 것이었다. 프로이트는 정말로 자기 자신을 혐오하고 성관계를 두려워하는 성 베네딕트의 세속적 재탄생이었을 뿐이다.

 

옥에 티를 찾아서 : 저자는 공자와 유비의 만남에 관해 썼다. 유비가 공자를 찾아온 것처럼 표현하였는데 불가능한 만남이다... 공자가 만난 유비는 내가 아는 유비가 아니고 누구였을까? 본문을 옮긴다.

한번은 자신을 찾아온 유비를 보지 않으려 꾀병을 부리고는 불쌍한 유비가 자리를 뜨자 거문고를 타며 다 들리게 노래를 불러 유비 자신이 모욕당한 것임을 알게 했다’(96) 

여기서 자신은 공자를 말하는 것같다. 참고로

공자의 생멸시기는 BC551년 주의 제후국인 노나라에서 출생하고, BC47973세의 나

이로 사망하였다.

유비의 생멸시기는 16179일 태어나 2336.10일 사망하였다. 향년 72세였다.

제갈량의 생멸시기는 181년 태어나 234 54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작가가 잘못 기억했거나, 김 교수가 잘못 알려준 것으로 추정된다.(아닐까?~인터넷 강호들의 검색이 필요하다!)

예스24에서 꺼내왔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