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회 이상문학상 우수작, 백수린, 아주 환한 날들
내 인생에서 ‘아주 환한 날’은 얼마나 될까? 동영상을 보다가 정지를 시키고, 캡처를 하듯 내 인생의 환한 날을 예쁘게 잘라 노트에 붙이고, 소감을 정감 있게 쓰고 싶지만 과거의 어느 한 장면이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인과의 연을 따라 지금까지 이어오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는 터라, 어디서 어디까지 잘라낼 수 있을지 자신이 없다.
아이들이 우리 곁으로 왔을 때가 환했었지. 내 눈에 너무나 예뻐 머리숱이 많으라고 빡빡머리를 한 아이 사진을 들고 주위 사람들에게 얼마나 자랑을 했던가. 고집이 센 나를 닮아 엄마를 이겨 먹을 듯 달려들던 녀석을 강압적으로 억눌렀던 기억에 환한 날이 조금씩 어두워진다. 매를 아끼면 아이를 망친다는 영국 어느 구석의 속담에 속아 아이를 억누르고 때려 아이들의 마음에 준 상처는 지금은 아물었을까? 나를 닮아 뒤끝이 있는 놈들이라 아마 지금도 나를 용서하지 않았으리라. 아이들을 핑계로 나의 환한 날이라고 하면 거짓말이 될 것 같다.
인생의 동반자라고 일생을 같이 하자고 했던 예쁜 아내도 나에게 상처를 받고는 치유 중이다. 자기가 한 짓은 모르고 내가 한 짓만 비난한다는 나의 변명은 어둡기만 하다.
아이가 데려온 강아지와 뒷산을 하루가 멀다 하고 다니던 그 시절은 어때?
산속에 들어가면 목줄을 풀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산을 오르내리던 밤이면 서로가 의지하며 무섬증을 달래던 기억이 새롭다. 이제는 늙어 귀도 들리지 않는 너를 보면서, 헤어질 날을 준비해야 한다는 것, 이제는 산을 데리고 나가면 무리라는 말에 종내 인정을 하지 못하면서, 그럼 뭘 하지? 네 생명이 다하면 어떻게 해줘야 할까? 너를 묻을 곳을 생각하다 보면 너와의 인연의 끝이 밟히고, 아직도 여전히 맑은 네 눈망울에 내 마음이 서럽다.
젊음이 가고 노년이 다가오는 인생에서 과연 어떤 것이 나를 환하게 웃게 만들 수 있을까? 둘째 아이가 데려온 앵무새와 친해졌다고 생각했다가, 무정란을 낳고 알을 품고 있는 둥지에 가까이 가면, 눈동자를 카메라 셔트처럼 닫고는 머리를 늘어뜨려 나를 공격하려는 모습에서 내가 네게 해 준 것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둘째에게는 먹은 것조차 내어주는 네 모습을 언감생심 내가 구하랴 싶다.
그래, 내가 해준 것들이 별로 없는데, 그 인과의 연에서 벗어나, 내가 심지도 않은 것을 원하는 것 자체가 문법에 맞지 않는 비문이다. 그래 이제부터라도 씨를 심어야 하겠다. 그 씨가 싹이 나고, 열매를 맺으면 ‘아주 환한 날들’이 내게도 올지도 모르겠다. 그때까지 살고 싶다고 욕심을 부려볼까? 욕심만 빼고 주어진 하루하루를 그냥 살아내자. 인연의 감옥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훨훨 날아가는 그날 하루만 아주아주 많이 환한 날이었으면… 마음이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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