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유정 장편소설, 종의 기원, 은행나무
이야기를 몇 장 넘기면서 ‘어~이거 어디서 본 것 같은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에도 책을 읽었던 것인지, 영화에서 본 것인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마치 자신의 행동을 기억하지 않으려던 유진이처럼.
만약 전에도 읽었던 책이라면, 왜 이토록 기억이 나지 않는지, 왜 이렇게 이야기가 불편한지, 왜 이렇게 이야기를 읽는 동안 긴장을 하는지, 도무지 토막 난 기억의 단서를 찾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다, 유진이 그런 것처럼, 나도 불편한 이야기를 ‘재미있었다’는 감정만으로 처리하고 잊어버리려 한 것은 아닌지 돌아보았다. 읽던 이야기를 중단하고 이야기의 끝을 찾았다. 유진이가 새우잡이배에서 돌아와 길을 걷는 장면이었다. 주인공은 분명히 살인을 한 것 같지만 나는 끝까지 지원과 혜원 자매가 유진이의 인생을 막고 뒤틀리게 한 장본인이라는 착각 속에서 중단했던 부분에서 다시 읽어 내렸다.
정유정 작가의 책은 나의 서가에 작가별로 구분된 채 잘 보관 중이었다. 거기에는 분명 작가의 글이 지금 들고 있는 책의 두께보다 작아져서 같은 책이 아니라는 듯 눌려 있었다. 왜 나는 두 번째 읽는 이야기 속에서 유독 유진이가 살인을 한 장면들만 기억하지 못한 채 그를 옹호하고 있을까? 종탑, 난간 위로 뛰어오르면서 형을 향해 주먹을 날리고, 종 줄을 틀어진 채 비틀거리는 형을 발로 걷어차는 그래서 포물선을 그리며 절벽 아래로 추락하는 형을 꼼짝하지 않고 지켜보는 유진이를 기억하지 못할까? 술 취한 남자를 피해 가로등 뒤편으로 숨은 여자의 목을 그은 유진이를 왜 기억하지 못할까? 어머니와 이모를 죽인 유진이는 또 왜? 심지어 해진과 유진이 뛰어든 바다에서 해진이 죽는 것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내가 책을 허투루 읽었다는 말인가? 추리소설의 대강의 줄거리까지 기억 안 날 정도로?
나는 아마도 전에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나에게 불편한 그 무엇을 느끼고 머릿속 깊은 창고에 유진이가 죽인 사람들의 시신을 둔 것 같다. 누군가를 죽이고 싶어 했던 어린 시절의 기억이 그렇게 만들었을지도 모를 일이고, 억울하면 억울함에 터져 나오던 ‘죽여버릴 거야’라는 말이 그렇게 시켰는지도 모를 일이다. 어쩌면 가장 가까운 사람들, 그를 사랑했던 사람들을 죽이는 일을 서슴없이 서술하는 이야기가 불편해서 머릿속 깊은 창고의 쓰레기통에 버렸을지도 모른다.
두 번째 읽는 정유정의 이야기가 이제는 불편하지 않다. 아마도 망각한 후 세 번째로 ‘종의 기원’을 사서 읽게 된다면 단박에 전에 읽었다는 것을 기억할 것 같다. 작가도 이 이야기를 쓰면서 세 번씩 부수고 다시 썼다고 했다 ‘작가인 ‘나’가 어린 시절부터 학습돼온 도덕과 교육, 윤리적 세계관을 깨버리지 못했다는 걸. 주인공인 ‘나’는 그런 것에 전혀 구애받지 않는 ‘맹수’인데. 더 나쁜 건, 그 틀이 깨지는 걸 두려워하고 있었다는 점’이라고 말한다. 아마도 나도 그랬던 것 같다.
정유정의 이야기는 재미있다. 그 재미가 조금은 불편할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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