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에세이

시 따라 걷는 생각4

무주이장 2021. 12. 30. 09:24

시 따라 걷는 생각4

 

마법의 시간                             최영미 시인

 

사랑의 말은 유치할수록 좋다

유치할수록 진실에 가깝다

기다려찌

어서와찌

만져줘찌

뜨거워찌

행복해찌

 

유치해지지 못해

충분히 유치해지지 못해

너를 잡지 못했지

너밖에 없찌,

그 말을 못해 너를 보내고

바디버터를 덕지덕지 바른다

너와 내가 함께 했던

마법의 시간으로 돌아가고파

 

망고와 파파야 즙을 머리에 바르고

올리브오일로 마사지하고

싱그러운 페퍼민트와 장미꽃 향으로

중년의 냄새를 덮고

어미의 병실에서 묻은 기저귀 냄새도 지우고

기다려찌

너밖에 없찌

 

 

 

젊은 날, 사랑하는 사람에게 저러고 싶었다. 그런데 그렇게 하면 남들이 미친 놈하고 조롱했다. 조롱이 무서워 개그 프로그램에서만 즐겼다.

나 예쁘찌?

나 좋찌?

실실 조롱하듯 웃으면서 속으로는 부러웠다.

그냥 그렇게 말하면 되었을 것을, 말 못하고 난 원래 그래라고 자신을 평가했다.

자격도 없는 것이.

중년을 넘어 노년을 바라보는 오늘도 아직 그러지 못한다.

사랑하찌. 아이들이 나에게 유치해지면

뭐찌? 고맙찌 정도는 되었는데

소파에 다리 접어 텔레비전 소음 속에서 잠 든 아내에게 아직도 말 못한다.

미안하찌

사랑하찌

고맙찌

충분히 유치해지지 못해, 늘 아내의 마음에 구멍을 내지만,

그래도 다행인 것은 나를 떠나지 않은 아내의 진지함이다.

떠나지 않을꺼찌? 속으로 묻는 말에

'씰 데 없는 소리하고 있네.' 아내의 예상 대답이 가슴을 쓰다듬는다.

 

 22쪽~23쪽에 '마법의 시간'이 발표되었습니다. 최영미 시인의 소개를 예스24에서 찾아 옮깁니다.

1961년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대 서양사학과와 홍익대 대학원 미술사학과를 졸업했다. 1992년 [창작과비평] 겨울호에 「속초에서」 외 7편의 시를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서른, 잔치는 끝났다』, 『꿈의 페달을 밟고』, 『돼지들에게』, 『도착하지 않은 삶』, 『이미 뜨거운 것들』, 『다시 오지 않는 것들』, 『The Party Was Over』, 장편소설 『흉터와 무늬』, 『청동정원』, 산문집 『시대의 우울: 최영미의 유럽일기』, 『우연히 내 일기를 엿보게 될 사람에게』, 『화가의 우연한 시선』, 『길을 잃어야 진짜 여행이다』, 『아무도 하지 못한 말』, 명시를 해설한 『내가 사랑하는 시』, 『시를 읽는 오후』 등이 있다. 『돼지들에게』로 이수문학상을 수상했다. 시 「괴물」 등 창작 활동을 통해 문단 내 성폭력과 남성 중심 권력 문제를 사회적 의제로 확산시켜 성 평등에 기여한 공로로 2018년 서울시 성평등상 대상을 받았다. 2019년 이미출판사를 설립했다(예스24 최영미 시인의 작가 소개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