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에세이

시 따라 걷는 생각2

무주이장 2021. 12. 23. 11:57

시 따라 걷는 생각2

 

()                                                           최영미 시인

 

나는 내 시에서

돈 냄새가 나면 좋겠다

 

빳빳한 수표가 아니라 손때 꼬깃한 지폐

청소부 아저씨의 땀에 전 남방 호주머니로 비치는

깻잎 같은 만원권 한장의 푸르름

나는 내 시에서 간직하면 좋겠다

퇴근길의 뻑적지근한 매연 가루, 기름칠한 피로

새벽 1시 병원의 불빛이 새어나오는 시

반지하 연립의 스탠드 켠 한숨처럼

하늘로 오르지도 땅으로 꺼지지도 못해

그래서 더 아찔하게 버티고 서 있는

 

하느님, 부처님

썩지도 않을 고상한 이름이 아니라

먼지 날리는 책갈피가 아니라

 

지친 몸에서 몸으로 거듭나는

아픈 입에서 입으로 깊어지는 노래

절간 뒷간의 면벽한 허무가 아니라

지하철 광고의 한 문장으로 똑떨어지는 고독이 아

니라

사람 사는 밑구녁 후미진 골목마다

범벅한 사연들 끌어안고 벼리고 달인 시

비평가 하나 녹이진 못해도

늙은 작부 뜨듯한 눈시울 적셔주는 시

구르고 구르다 어쩌다 당신 발끝에 채이면

쩔렁! 소리 내어 울 수 있는

 

나는 내 시가

동전처럼 닳아 질겨지면 좋겠다

 

 

 

 시가 허황되면 고상해지고, 먼지가 낀다. 그런 시를 쓴 시인의 얼굴은 밝은 듯, 칙칙하다. 조명 속 디민 얼굴엔 만들어진 웃음이 있지만, 조명 밖 손은 유부녀 허벅지를 더듬고 있을지 모른다.

 

 시가 고상하고, 허황되면 시인 꼴은 더러워진다.

 

 아는 사람만 안다.

예스24 책방 이미지, 110쪽에 '시(詩)'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