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T: 갈라디아서 3:19-29 율법이 가진 기능의 이중성
그러면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들과 반대되는 것이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만일 능히 살게 하는 율법을 주셨더라면 의가 반드시 율법으로 말미암았으리라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에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라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는 율법 아래에 매인 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초등교사 아래에 있지 아니하도다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이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갈라디아서 3:21-29)
어제 QT 중에 유대교의 하나님과 개신교의 하나님은 같은 분인가에 대한 물음에 대한 답이 오늘 QT 중에 나온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주신 율법은, 아브라함에게 먼저 주신 ‘한 자손을 통한 유업’의 약속과 결코 모순되거나 상충되지 않습니다. 처음부터 그리스도에 관한 계획 없이 율법으로만 의롭게 되는 길을 마련하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라고 매일성경에서 해설을 합니다.
유대인은 자기 민족이 정착한 지역 외의 주민을 이방인이라고 부릅니다. 이방인의 사도라고 불리는 바울조차도 ‘이방인’이라는 표현을 입에 달고 삽니다. 유대인들이 선민의식에서 그들 이외의 여러 민족을 얕잡아 이르던 말이라고 사전은 정의합니다. 지금의 사전적 의미는 당시 유대인들에게도 의식적으로 자리 잡았던 이방인에 대한 시각이라고 봅니다. 유대교의 하나님이나 개신교의 하나님은 동일한 하나님인 것으로 보입니다. 모세의 조상을 족보를 찾아 올라가면 아브라함이 나옵니다. 아브라함은 생물학적으로 유대인입니다. 아브라함이 받은 하나님의 약속과 모세가 받은 하나님의 약속을 유대인들은 자기들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언약이라고 믿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하나님은 동일한 하나님이겠지요. 이 하나님은 유대인들에게는 친숙한 하나님이지만 이방인들에게는 바울이 전파하기 전에는 방인들만의 하나님이었을 것입니다. 방인과 달리 이방인은 하나님과 언약이 없는 민족이니 차별하는 것이 당연하였겠지요.
차별은 자기 합리화를 합니다. 율법은 지식이 되고 특권을 형성하게 됩니다. 율법은 어려울수록, 복잡할수록 율법을 다루는 계급에는 유리하게 작용합니다. 라틴어로 된 성경을 자국어로 번역하는 것이 왜 구교의 사제들에게 위협으로 느껴졌는지도 이런 시선으로 보면 이해가 됩니다. 율법은 더욱 정교해지고 이론적 체계를 형성했을 것입니다. 저는 율법의 내용은 주마간산으로 목사님들을 통해 간혹 들었을 뿐입니다. 잘 모릅니다. 하지만 현실에서 율법을 철저히 지키는 것은 정말 불가능하다는 것으로 들었습니다.
율법이 죄를 짓게 만드는 것이라고 바울이 얘기한 것을 이해했습니다. 그럼 율법은 없어져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들과 반대되는 것이 아니다고 다시 바울이 설명합니다. 오늘 새벽기도회의 설교 목사님은 “율법은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시켜 나가는 도구 중의 하나”라고 설명을 하십니다. 그럼 율법은 어떤 기능을 할까요?
매일성경 해설에서는 율법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는 자유와 교제의 수단이 되지만, 하나님을 거절하는 자들에게는 정죄의 수단이 된다’ 믿는 자에게는 자유와 교제의 수단이고 불신자에게는 죄인이라고 부를 수 있는 수단이 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주시고 유대교에서 발전시킨 율법은 순수한 하나님의 말씀이 아닙니다. 사람이 개입해서 만든 율법이라 대의는 거역할 수 없으나 미세한 부분에서는 옳다는 동의를 할 수 없는 부분도 많을 것입니다.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는 말이 있듯이 아무리 하나님이 최초 주신 율법이라고 해도 그후 인간이 개입한 율법의 디테일에는 차별과 위법과 특권과 잔인, 잔꾀 등 온갖 술수를 합리화하는 것들로 가득합니다. 여기에서 저는 바울을 포함한 방인들이 주장하는 율법의 기능을 인간의 이중성으로 이해합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세상은 서로 토론이 되지도 않는 편가름 속에 놓여 있습니다. 하나의 사실을 보고 사실을 인정하기보다는 해석의 다의성이라는 명제를 핑계로 서로 상반된 사실로 인식합니다. 상대를 인정하지 않는 차별이 생기는 이유라고 믿고 있습니다.
이런 꼴을 보신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을 이 땅에 보내셔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이미 주신 언약들을 형해화시킨 인간들을 종전처럼 정죄하시고 처벌하시는 것을 포기하시고, 오히려 용서하시기 위하여 당신의 아들 예수를 십자가에서 죽게 하십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죄를 용서받고 예수님과 함께 부활하여 새로운 삶을 살기로 믿음을 가졌습니다. 바울은 율법은 우리가 믿음을 갖기 전 우리를 믿음으로 이끌기 위한 초등교사의 역할을 했을 뿐이라고 설명합니다. 이제는 율법이 아닌 믿음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초등교사를 더는 만나지 않아도 된다고 하십니다.
저는 유대인들이 선민의식으로 인해 가지게 된 방인의식으로 인한 이방인의 차별을 미워합니다. 유대교에서 애지중지하는 율법은 애초 하나님이 주신 언약이었음을 이해하였습니다. 비록 율법이 이중적 기능을 행하고 있음에도 그 기능을 부정할 수 없음을 이해하였습니다. 그럼에도 유대인이라는 단어가 생물학적인 개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단어이고, 이방인이라는 단어가 차별을 전제한다는 점에서 제 좁은 속에서 갈라디아서가 쉽게 이해가 되지 않고 복잡한 논리 과정을 통해 이해하려는 노력을 하게 합니다.
쉽게 이해되지 못하는 경우에는 본인의 무지를 탓함도 필요할지 모르지만, 그 글을 쓴 사람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번역하였다는 것을 의심해보란 말이 기억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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